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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변백현
18.
“변... 백... 혀언...”
아이는 요즘 한창 한글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봄이 오면 학교에 입학해야 하니 그 전에 글자를 가르쳐줘야 했다. 빨리 자라긴 해도 입학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걱정했는데, 빨리 자라는 만큼 습득력이 좋아 가르치는 대로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금세 기역니은을 외우고 이젠 꼬불꼬불한 글씨로 제 이름까지 쓰곤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우리 아이가 천재는 아닌지 잠깐 생각할 정도였다.
“김... 윤... 서...”
아이는 제 이름에 비해 비교적 쉬운 내 이름도 척척 썼다. 그래놓고 나를 보며 칭찬을 해달라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꼬맹이 학교 다니면 누나는 심심해서 어떡하지?”
“누나 심심해?”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같이 가면 되지!”
“누나는 학교 이미 다 다녔는데?”
말문이 막힌 아이가 눈꼬리를 축 내리며 입술을 다물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볼을 가볍게 쓸었다.
“집에서 백현이 기다려야지 뭐.”
“나 기다려?”
“응. 우리 꼬맹이 언제 오나, 기다려야지.”
내 말에 다시금 웃어 보인 아이는 다시 노트에 집중해 꼬물꼬물 무언가를 써냈다. 무슨 글씨를 쓰나 하고 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단어.
누나 사라해.
“누나 사랑해?”
“응!”
아이는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으며 아이가 틀린 받침을 써주었다.
“사랑한단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무슨 뜻인지 알아?”
“알아!”
“뭔데?”
“음...”
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놓고 설명하긴 어려운지 한참이나 고민한다. 하긴 나도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곧바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 쪼끄만 녀석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서 대답을 계속 기다렸다. 결국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연필을 놓고 내 품으로 와 안겼다.
“누나 사랑해에.”
이젠 내 품 가득히 차는 아이의 몸을 안아주었다.
“누나도 사랑해.”
19.
최근 들어 아이가 밤마다 아팠다. 사람보다 몸이 빨리 자라는 만큼 성장통도 심했다. 오늘은 많이 아픈지 아예 새벽 내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울먹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애타는 마음으로 손이 저리도록 아이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백현아, 많이 아파? 약이라도 먹을까?”
“으응...”
약이라면 질색하는 아이가 많이 아팠는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염진통제 시럽을 한 모금 먹여주었다. 쉬지 않고 다리를 주물러주는데 아이가 손을 뻗어 내 손 위로 겹쳤다.
“누나아...”
“응. 약 먹었으니까 좀 있으면 안 아플 거야.”
“나 안아줘.”
아이가 내 손을 간질였다. 아파서 울먹이느라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안쓰러워 손끝으로 살살 쓸어주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가 내 목에 매달려 편히 안겼다.
“많이 아파?”
“......”
“이렇게 아파서 어떡할까. 쑥쑥 커서 얼른 어른 되려고 그러나 보다.”
“...으응.”
“어른 되기 힘들지? 어른 되지 말까?”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이는 대답 없이 내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내내 앓았으니 피곤할 게 분명했다.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어른이 되는 건 이렇게 아프다. 우리 애기는 어른이 될 때도, 어른이 되고도 많이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
“우리 백현이 아픈 거 다 누나한테 와라.”
어느덧 귓가에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이나 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다가 눕혀주었다. 축 처진 눈꼬리에 매달렸던 눈물도, 미간의 주름도 사라져 편한 얼굴로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20.
“누나아, 뭐해?”
“일기 써.”
“일기?”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일기장을 덮었다. 전엔 아이 옆에서도 일기를 마음껏 썼는데 이젠 아이가 글자를 읽을 줄 아니까 보여주어서는 안 됐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내 일기장에 관심을 보이며 기웃거렸다.
“백현이도 쓸래?”
“응! 나도!”
서랍에서 새 노트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일기는 오늘 있었던 일을 쓰는 거야. 오늘 했던 생각을 써도 되고. 매일매일 쓰면 좋지만 쓸 말이 없으면 억지로 쓰지 않아도 돼. 써 봐.”
빈 노트를 보고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연필을 꼭 쥐고 천천히 글자를 썼다.
“오늘... 누나랑 산책 갔고...”
“일기는 남들한테 보여주는 거 아니야. 혼자만 봐.”
“헙.”
아이가 놀라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내게서 휙 등을 돌려 일기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엎드려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난 어릴 때 일기 쓰기 싫었던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갈지 싶었다.
21.
다시 봄이 찾아왔다. 아이는 읍내에 있는 수인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보내기 전, 가방이나 필기구 같은 걸 사면서도 얼떨떨했다. 이제 아이는 학생이 되었다. 수인 학교의 교복이 아이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지만 한편으론 낯설기도 했다.
내내 나와 둘이서만 지냈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기도 했고, 어느 날은 친구네 집에서 놀다 오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늘어놓곤 했는데, 그걸 듣고 있으면 너무도 뿌듯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엔 당연히 나 혼자였다. 전엔 시간을 혼자 보낸다는 건 내게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는데, 아이와 함께 지내고 난 후론 곁에 늘 아이가 있었기 때문인지 적막이 감도는 집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읍내에 있는 한 카페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지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의 일기를 다 쓰고 일기장을 덮었는데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내게로 쪼르르 걸어왔다.
“여기서 잘 거야?”
“응!”
“방 놔두고.”
“여기가 좋아아.”
아이가 입학한 후로 아이의 방을 따로 만들어주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비어 있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아이의 물건을 가져다 둔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늘 내 방 내 옆자리에서 잠을 잤다. 아이가 제 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책가방을 싸는 거나 일기를 쓰는 것 정도였다.
“오늘 일기 썼어?”
“응.”
“진짜? 얼마 못 갈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
아이는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 같았다. 수인 학교에선 일기를 써 오라는 숙제는 내주지 않는지 처음에 내가 줬던 노트를 계속 쓰다가 며칠 전에 새 노트를 샀다. 빠르게 자라는 아이이니 일기장 한 권에도 성숙해지는 아이의 모습이 전부 담길 터였다. 생각보다 잘 쓰고 있으니 잘 보관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을 청하려 내게 붙어 꼬물꼬물 움직이며 내 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의 몸은 매일매일 쭉쭉 자라나고 있었다. 엉덩이를 토닥거려주었다.
“우리 꼬맹이 매일 쑥쑥 크네. 콩나물이야 아주.”
“왜 콩나물이야?”
“응? 콩나물도 물만 먹으면 쑥쑥 빨리 자라거든.”
나 초등학교에 다닐 땐 콩나물 키우는 실험 같은 것도 했던 것 같은데, 수인 학교에선 그런 건 안 가르쳐 주는 걸까 싶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여유롭게 아주 다양한 실험이나 활동까진 전부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럼 내일부터 콩나물 키워볼까?”
“응!”
“그래. 다 크면 국도 끓여 먹자.”
“좋아!”
신이 나서 눈을 빛내는 아이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살짝 놀란 듯 아이는 고개를 뒤로 빼며 밉지 않게 눈을 살짝 흘겼다가, 이내 맑게 웃으며 내 볼에 쪽 뽀뽀를 했다.
22.
다음 날에 바로 콩을 심어 키웠다. 아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한참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하며 물을 듬뿍 주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학교에 다녀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콩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아이가 주는 물을 잔뜩 흡수한 콩은 며칠 만에 금세 자라 길쭉한 콩나물이 되었다. 인터넷을 참고해 적당히 자랐을 때 콩나물을 수확했다.
“신기하지. 백현이가 키운 거야.”
“응! 진짜 빨리 자랐어.”
그날 저녁에는 직접 키운 콩나물로 국도 끓이고 조금 남은 걸로는 무침까지 했다. 아이는 야무진 젓가락질을 하며 콩나물을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괜히 뿌듯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었더니, 내 시선을 느낀 아이가 콩나물 무침을 불쑥 내 입에 내밀었다.
“누나 주는 거야?”
“응. 아, 해!”
입을 열어 아이가 주는 걸 받아먹었다. 쪼끄만 게 좀 컸다고 이젠 나한테 뭘 줄 줄도 안다. 몸이 자라며 눈에 띄게 어른스러워지는 모습이 기특하고 뿌듯하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건 여전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했다.
23.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상상도 못 했던 질문을 했다.
“누나, 나는 왜 엄마가 없어?”
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얼굴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응? 엄마는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며?”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친구들은 다 엄마가 있대?”
혹여 학교에서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놀림이라도 당했을까 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역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가 다 있는 것만큼은 못한 걸까. 그러나 아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냐앙. 나는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태어났을까 궁금해서.”
“......”
내 걱정과는 달리 해맑은 얼굴을 한 아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왜 아빠가 없을까? 친구들이 아빠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봤고, 그러다 누군가가 윤서는 아빠 얘기 왜 안 해? 하고 물은 날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나는 왜 아빠가 없냐고, 우리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땐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아빠가 없긴 왜 없어! 열 밤만 자면 아빠가 우리 딸 데리러 올 거야.’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후에 내게 돌아온 건 더 큰 실망감이었지. 결국 모든 건 엄마의 욕심이었고.
“누나!”
“어? 아.”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아이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살짝 웃으며 아이의 부드러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백현이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셔.”
“하늘나라?”
“응. 대신 누나가 더 잘해줄게.”
“응!”
아이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누나도 엄마 있어?”
“누나 엄마도 하늘나라에 있어.”
“우리 엄마랑 같이?”
아이다운 물음에 살짝 웃고 말았다. 우리 엄만 지옥에 갔을 테니 아이의 엄마와 같이 있진 않을 텐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모님 안 계시다고 기죽고 그러지 마. 부모님만큼 누나가 백현이 사랑하니까.”
“응. 나두 누나 사랑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아이는 당연한 순서처럼 내게 가까이 다가와 뽀뽀를 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이었다.
아이는 내게 행복, 그 자체였다.
24.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아이에게 올해의 생일과 내년의 생일은 차이가 아주 클 테니 기억에 남을 만한 생일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들과 커다란 케이크를 준비했다. 제 또래의 친구들과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제 이름이 적힌 케이크를 보며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덩달아 행복했다.
다 같이 생일 노래를 부르고, 차려진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저들끼리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니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마당으로 뛰어나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장난을 쳤다. 같은 수인이라도 종이 다르니 아이와 같은 강아지도, 다람쥐나 조그만 햄스터도 있었다. 서로 키가 엇비슷한 사람의 모습일 때와는 달리 덩치 차이가 꽤 나는데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게 잘 어울리는 모습을 마루에 앉아서 한참이고 지켜봤다.
한참을 뛰어놀던 아이들은 지쳤는지 5월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하나 둘 마당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는 친구들이 모두 잠들자 내가 있는 마루까지 뛰어올라 내 무릎에 앉았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밌게 놀았어?”
조용히 말을 걸자 아이는 대답하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멍, 하고 짖었다. 아직도 신이 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자란 아이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25.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밤, 어질러진 집 안을 청소하고 방에 앉아서 일기를 쓰는데 아이가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 쓴 일기장을 덮으며 왜? 하고 물으니 대답은 않고 쭈뼛쭈뼛 다가와 내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누나한테 할 말 있어?”
“으응.”
“뭔데 그래.”
도대체 할 말이 뭐길래 아이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싶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할 말이 뭐냐고 물으니 내 시선을 슬쩍 피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모은 조그만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머뭇대는 게 귀여워서 웃음을 꾹 참으며 잠자코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누나.”
“응?”
“백현이...”
“응.”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아.”
그 한 마디가 부끄러웠는지 아이는 몸까지 배배 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 들어왔다. 잠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다가, 두 팔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어지간히 부끄러운 듯 아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폭 묻었다.
“누나도 고마워. 안 아프고 이쁘게 커서.”
“......”
“이런 말은 누구한테 배웠어, 응?”
“선생님이...”
“선생님이 알려주셨어?”
“으응.”
아이의 뺨에 몇 번이고 입술을 맞댔다. 처음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뒤로 빼던 아이는 쪽쪽 소리가 이어질수록 점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결국엔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잡고 내 입술에 꾹 도장을 찍듯 뽀뽀했다.
“생일 축하해, 우리 백현이.”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맑게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