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image.png.jpg

딱히 크게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국사시간때 이런 지도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굳이 따지면 고조선 지도는 저렇게 동쪽으로 쭉 갈것 없이 요동, 평양 중심으로

반달 형태로 묘사하는게 더 좋겠지만

고조선이 글 주인공이 아니니 생략)

고조선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다 안다.

그런데 학창시절 국사 시간때 고조선 아래에 '진국' 이라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진국' 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도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고조선 이야기는 많이 해도,

정작 현대 대한민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것은 예전 진국의 판도인데

이쪽에 관해서는 많이들 무관심하다.

이 글에서 다룰 것은 바로 '진국'에 관한 스토리다.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아주 오래전 옛날, 한반도 땅에는 '송국리 문화' 라는게 있었다.

대략 3000년부터 있었다는 말도 있고 2500년전이라는 말도 있으나,

여하간에 이 송국리 문화는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경상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이후 지배적인 문화 유형이 되어 한반도 남부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러면 지금 한반도 사람들은 전부 송국리 문화의 후신이겠네, 하면 아주 간단하지만

이게 좀 복잡해진다.

image.png.jpg

대략 기원전 600년 전쯤 무렵, 지금 우리가 아는 고조선 땅에서 '정가와자 유형' 이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건 '정기와자 마을' 에서 나온 고분의 유형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정기와자 유형은 새로운 형식의 유형이었는데,

나온 직후 이질성이 강한 요동의 여러 유형을 통일하고 200년이 지난 기원전 400년 쯤에는

요동에서 완전히 통합적인 유형이 된다.

즉 고고학적으로는 이때 요동이 통일된 것이고, 그게 '고조선' 이라는것이다.

마침 고조선이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것이 '관자' 라는 책인데,

관중은 기원전 700년대의 인물이지만 관자는 4세기 쯤에 만들어진 책이라 문헌에 등장하는 타이밍도 비슷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그보다 앞선 기원전 900년 무렵부터의 '십이대영자 문화' 가 정기와자 유형의 직계 조상이며

기원전 9세기경 십이대영자 - 기원전 6세기 경 정기와자 유형 - 기원전 4세기 쯤 요동을 통일하는 국가의 형성

같은 식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길게 가면 끝이 없으니 생략한다,

어찌되었건 시작이 언제였던 간에 유적의 유형상 통일적인 흐름이 보이고

외국의 문헌 기록에서도 언급되는등 고조선의 체급이 꽤 커진것이 기원전 4세기 쯤이라는것.

image.png.jpg


전국시대 연나라 최고 네임드 악의. 고조선하곤 상관없음.

그러나 한참 세력을 키우던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무렵 '전국칠웅' 중 하나인

중국 북방의 '연나라' 와의 전투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대패했고

2천리가 넘는 영토까지 밀려나며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image.png.jpg

그런데 당시에 유행하던 토기문화 중에 '점토대토기 문화' 라는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점토대토기는 앞서 말한 "정기와자 유적" 에도 나오던 것이라,

원래 시작이 요동에서 시작되었던 문화였다.

그런데 이런 점토대토기가 한반도의 금강, 만경강 유역에서

앞서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털렸던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발전을 하고

기존에 문화였던 '송국리 문화' 를 대체하게 된다.

요동에 있던 문화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번성하게 되었으니, 북방에서 전파되었던것.

그리고 그 계기가 바로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image.png.jpg

점토대토기 문화를 중심으로 한 요동 지역의 문화가 내려오기 전에

이미 현재 대한민국 땅에는 '송국리 문화'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쇠퇴하게 되고,

마침 기원전 3세기 쯤 혼란을 피해 남하한 고조선계 사람들로부터 유행한

'점토대토기' 문화에게 지배력을 뺏기게 된다.

밀려난 일부는 일본으로 떠나기도 했다.

물론 전부 다 일본으로 뜨진 않았을테고, 대다수는 자연스레 동화 되었을 터다.

이런 송국리 문화의 갑작스런 쇠퇴에 관해서 고조선 계 유민들에게 전쟁에서 패했다,

혹은 갑작스런 기후변화 때문이다 등등 말은 많으나

정확하게 말하면 자세한건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러지 않을까 추측만 할뿐...

송국리 문화는 분명히 한반도 땅에서 오래 향유된 문화였지만

이 시점을 기점으로 후대에 연속성이 사라지게 되고

반대로 북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문화는 계속 연속성을 지녀 후대로 이어지게 되니

사실상 이 점토대토기 문화야 말로 한반도 땅에 사는 한국인들 역사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image.png.jpg

한편 기원전 3세기 연나라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쪼그라들었던 고조선은

이후 중국 전국시 말기의 대혼란 및

진한교체기, 즉 '초한지' 시대의 혼란을 틈타 야금야금 세력을 회복한다.

이 과정에서 혼란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은 대거 포섭했고

인구가 바로 국력이었던 시대니 무너졌던 고조선은 다시 일어서는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시 고조선의 왕 '준왕' 은 망명자인 '위만' 을 너무 신뢰하였고

위만 세력에게 준왕은 1,000명 정도의 측근과 함께 쫒겨나게 된다.

하루아침에 왕의 신분에서 망명자가 되어버린 준왕.

그러면 준왕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image.png.jpg

고려사 지리지의 '금마군' 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후조선(後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亂)을 피해 바닷길로 남쪽으로 왔는데,

한(韓)의 땅에 이르러 개국하고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그 나라를 병합한 후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려졌으며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때의 금마군은 현재의 전북 익산이다.

즉 고려시대 때는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난 후 전북 익산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고려시대에서 준왕이 남하한 시기는 무려 1,000년은 차이가 난다.

자기 살던 시대에서 1,000년 전에 대한 기록이라니... 이것만 봐서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 문화가 가장 번성한곳이

다름아닌 전북 익산 근처의 금강, 만경강 유역이다.

고조선이 왕이 남쪽으로 쫒겨나며 고조선 세가 가장 강한곳으로 계속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말이 잘 맞아 떨어지는것.

삼국지 동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준은 가까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땅(韓地)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우리나라를 '대한민국' 이라고 한다.

큰(大) 한의 민주국가民國라는 소리이니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이름은 '한' 이다.

그래서 한민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한은 의미가 계속해서 바뀐 이름이다.

시작은 저 준왕에서 나오고

이후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등장하며 삼한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가

정치체제로서 삼한이 사실상 거의 소멸된 이후로는 "종족명" 이 되어

광개토대왕릉비 등에서는 과거 삼한에 속했던 "한인" 과 "예" 등을 구분한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때에 이르면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 로 바뀌어

신라인들은 '삼한일통' 하였다고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

고종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꿀때 이 대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뜻이었다.

즉 지금 한민족 전체를 막론하는 이 '한' 이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준왕이 '한지韓地' 에 가서 자신에 '한지의 왕' 즉 '한왕' 이라 일컫은 좁은 의미였다는것.

정말 신기하고 재밌는 부분이다.

그럼 일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될까?

준왕이 스스로 한(韓)족이라고 일컫는 무리들이 사는,

즉 한족들이 사는 한지에 갔기에 한의 왕이 되었던것일까?

아니면 준왕이 먼저 한왕을 자처하고,

이에 따라서 준왕이 왕이 된 곳 역시 자연스레 "한의 땅" 이 된 것일까?

정확히는 모르나 많은 저서들에서는 "준왕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한' 이 있었다" 고 이야기 하긴 한다.

이런 견해를 따르면, "한민족 최초의 한韓족" 은

전북 익산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던, 고조선 계통의 소규모 집단이었던것.

그리고 준왕이 그 한韓족의 땅인 한지에 도달해서, 스스로를 이 무리의 왕, 한왕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후한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과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자립하여 다시 진왕이 되었다.

준왕이 마한을 쳤다고 나오나, 이 시기는 마한이 형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준왕이 쳤다는건 마한이라기보단 기존의 선주민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고조선에서 내려온 준왕은 그다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한지의 왕' 이 된 것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는 군사력을 동원해 '한지' 의 선주민들을 때려부수고 한왕이 되었는데,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후손이 절멸되고 만다.

마한 사람이 진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위에 언급했다시피 마한이 형성되기 이전이므로

기존 한지의 사람이 진왕이 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image.png.jpg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진왕' 의 나라 '진국' 이 나온다.

준왕의 '한' 은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했다.

후손도 아예 절멸되었다고 한다.

다만 230년~290년대 사람인 진수의 삼국지에

'그 후에 절멸하였으나, 지금도 한의 사람들 가운데 아직 그 제사를 받드는 자들이 있다.'

라는 말이 있으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준왕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고조선 유민들일까?

어찌되었든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만이 크게 이름이 남은 것과 별개로

당대에는 이 진국의 진(辰)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아주 크게 다가오는 이름이었다.

준왕의 한국이 허망하게 사라진 이후로,

한동안 한반도 남부의 중심적인 정치세력은 진국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기록에 남을 정도의 정치세력이 진국 밖에 없다.

image.png.jpg

진국에 대해서는 꽤 중요한 기록이 있는데,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사기에는 고조선의 우거왕 시절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이 한나라에 사절을 보내고 싶어 했으나 고조선이 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사기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북송본에는 '진번 주변의 진국을 고조선이 막았다'

남송본에는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를 고조선이 막았다' 로 나온다.

명확하게 '진국' 이라고 써진것과 '여러나라' 라고 써진것은 천지차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두 판본 중 어느것이 맞는지 격론을 펼쳤다.

그냥 생각해면 남송보다 북송이 더 오래된 시기니까 북송본을 믿으면 될것 같긴 하다.

그런데 두 판본보다 더 빠른 《태평어람》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된 기록을 보면 "주변의 여러나라" 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태평어람 대로라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진국' 이 언급되지 않는것이다.

image.png.jpg

사마천보다 좀 더 뒤의 반고의 '한서' 에서는 반대로 '진번 주변의 진국' 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있다.

사기보다는 100~150년 뒤의 기록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진국이 명확하게 언급된다.

이것이 진국에 대한 가장 이른 시점의 기록인 동시에,

여기서는 진국이 한반도 남부의 가장 대표적인 정치세력처럼 묘사된다.

image.png.jpg






삼국지에는 또 고조선의 역계경(歷谿卿)이라는 인물이 언급된다.

역계경은 고조선의 우거왕에게 무언가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질 않자

그대로 진국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간 사람이 2000호 였다.

2000호를 지금으로 따지면 무려 1만명이 된다.

기록의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중국에 사절을 보내려 시도하고

1만명이나 되는 망명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역량이 진국에는 있었던 것.

그럼 이 진국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누구는 한강유역이라고 하고, 더러는 경상도 지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히 확정은 못하지만) 또 금강 만경강 유역으로 보는 설이 많다.

image.png.jpg




또 나오는 금강-만경강 유역

고고학적으로 가장 청동기 문명이 발달하기도 했고

여기에 비정하면 준왕의 한이 망한뒤 자연스레 진국으로 넘어가는 흐름도 있다.

이 설대로라면 금강-만경강 유역은

기원전 3세기 고조선 유민의 정착 -

고조선 준왕이 새남하해 '한' 을 세운 지역 -

옛 고조선 유민 즉 '선주민' 들이 다시 진국을 세운 지역 -

요즘 하는 말로 "씹근본" 지역이 된다.

여하간 이 진국은 기록에서는 간략하지만,

후대에서 임팩트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마한이 가장 크며, 그 종(種)을 함께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는데,

목지국(目支國)을 도읍으로 하여, 삼한 땅의 왕으로 행세하였다.

- 후한서




훗날 삼한의 패권을 잡았다고 할만한 중심세력은 '목지국' 이었는데,

이 목지국은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당초에 백제나 신라조차도 한수 굽어주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 목지국의 왕은 '진왕' 으로 불렸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삼국지

월月지국은 목目지국의 오기로 보통 본다.

삼국지에서는 아예 숫제 목지국왕=진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 진국이 목지국이냐" 할 순 있는데 실제 진국이 활동했던 시기와 목지국의 패권 시대는 어느정도 시간 차이가 좀 있기 때문에

진국=목지국으로 볼 순 없고,

후대의 목지국조차도 "진" 의 이름을 썼을 정도로, 당시에 진국의 이름값이 대단했다고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런 진국의 영역적인 판도는 어떤 수준일까?

저 위에 언급한 지도처럼 그냥 한반도 남부를 죄다 진국의 판도에 넣고

진국이 삼한의 지배자였다는 식으로 본 시기도 있었으나

그냥 길게 말할것 없이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무리다.

후대의 백제, 신라도 한참 지나서도 무리인것을 기원전 2세기의 진국이 했을리는 만무하다.

때문에 주된 여론을 토대로 보면,

진국은 금강-만경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 및 중국에서의 영향으로 선진적인 지역으로 떠올랐고,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이 중국에 사절을 보낼때 중심이 되거나,

고조선에서 유이민이 내려올때 이를 관리하기도 하며 대표격인 역할을 하면서

여러 소국들에 얼기설기한 영향력을 끼치며 떠받들여 지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진국은 어느순간 사라진다.

멸망한다 말았다 말도 없이 그냥 어느순간 기록에서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image.png.jpg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한다.

더러는 망하건 말건 그냥 그 자리에서 살기도 했겠지만,

더러는 혼란을 피해 남으로, 더 남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거의 '조선인의 대이동' 이라고 부를 수준으로,

특히 최대한 동쪽 끝인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많았다.

image.png.jpg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이 망하고 내려온 유민들이 경주까지 내려와 6개의 마을에 나눠 살았다.

삼국지의 기록은 더 생생한데,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구전으로 이야기 하길, 자기들은 원래 중국에 살았는데

진나라때 시황제의 온갖 부역을 피해서 한의 땅으로 왔다한다.

그런 그들에게 마한(아마 목지국)에서 적당한 땅을 내줘 살라고 해서 정착중이라는것.

심지어 말 조차도 마한 사람들하곤 달랐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중국에서 바로 경상도까지 최대한 동쪽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 중국계 유민들은 고조선에 머물다가 내려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즉 조선이 망하는 과정에서 원래 조선인,

조선에서 끌여들었던 중국계 조선인,

혼란 피해서 도망친 그냥 중국인들

온갖 세력들이 짬뽕이 되서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이 시점부터 진국에 대한 기록이 끊긴다.

동시에 고고학적으로도 기존과 다른 성토분구묘 문화가 널리 퍼지는 변화가 생긴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해보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뭔가 일이 생긴듯하다.

마한 소국 중 하나이자 익산시에 있었을거라고 추정되는

건마국(乾馬國)이 이 시대 초창기 지배자로서 마한을 이끌었다는 말도 있으나

애초에 건마국이 익산에 있긴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는 만큼 뭐라고 말을 할수가 없다.

image.png.jpg

엄청난 유민이 북에서 내려왔다 - 즉 인구수가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조선 멸망 후 200년 만에 갑자기 엄청난 숫자로 여러 나라들이 생기기 시작하며

마한에만 54개국, 진한에 12개국, 변한에 12개국의 작은 나라들이 생겼다.

또한 진한은 '원래 6개국이었는데 12개가 되었다' 라는 언급도 기록에서 보인다.

갑자기 나라들이 팍팍 생기기 시작했다는것.

진국때도 사기 등에 '여러나라' 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진국 말고는 언급도 안되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위략>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국 지황 연간(20년~30년)에 진한 사람 염사치(廉斯鑡 )가 낙랑 땅이 기름지고 좋다는 말을 듣고

진한에 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참새를 쫒는 사람을 봤는데, 하는 말이 한인(韓人)과는 달랐다.

마침 염사치는 중국말을 좀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말을 걸어보니 그 사람이 중국말로 대답하길

"내 이름은 호래(戶來)다. 원래 한나라 사람이다.

우리 1,500명이 목재를 하러 나왔다가 한(韓)인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잡혀왔다.

강제로 머리를 박박 깎이고 노예 생활 한지 3년째다.

1500명 중에 500명은 이미 죽었다."

image.png.jpg

요즘 종종 나오는 "니 이름이 호... 뭐시라고? 여기서는 춘식이여" 역사판

그러자 염사치는 "내가 마침 낙랑에 가는데 같이 가자." 고 권했고,

호래 역시 좋다고 대답하며 같이 따라갔다.

그렇게 낙랑에 도착한 후 사정 이야기를 하자, 낙랑에서는 사절로 염사치를 진한에 파견했고,

"사람을 풀어주고 보상을 하라. 안 그러면 낙랑에서 1만 병사로 쳐들어가겠다." 고 하자

진한에서는 1만 5천명을 낙랑 쪽으로 보내고 변한에서 포 1만 5천필을 구해서 배상을 했다.

염사치는 이 공로로 벼슬과 집, 논밭을 얻고 부역과 조세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낙랑군이 삼한 지역 기존 세력들에게

협조하면 크게 상을 주고 반발세력은 무력으로 누르는 등의 회유와 협박을 써먹고 있는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근데 이 기록에 따르면 '진한' 이 일단 언급되고

추가로 '변한' 역시 언급된다.

서기 30~40년 쯤에 저런 정도의 행동이 나올 정도면,

대략 기원전 1세기 경에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형성되었다는게 현재의 의견들이다.

마침 저 시기는 고조선 유민들이 대거 남하하고 진국의 기록이 끊기는 시점과 완전히 동일하다.

고조선 및 중국계 유민이 남하할때, 진한의 노인이 했다는 저 위의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다시 보자.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자, 마한에서 땅을 분할해서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저 시기엔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없었다.

마한은 어차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살게 허락해주고,

그 과정에서 윗세력으로 우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급한대로 피난온 이주민들 입장에서도 땅을 주는데 굳이 마한세력과 싸우기보단

적당히 숙여주고 땅을 받아 개척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터.

기록을 보면 이주민들은 주로 경상도 쪽으로 많이 이주했다.

마한의 원류가 된 세력들은 이주민들을 경상도 쪽으로 땅으로 보내주는 동시에

일종의 상국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이주민들과 다른 기존 한(韓) 세력으로서

마한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한을 상국처럼 여기는 체제속에서 오래 시간이 지나며

진한, 변한 역시 '한' 으로서 정체성을 형성한것처럼 보인다.

image.png.jpg

삼국지, 후한서, 진서 모두 마한을 진한, 변한보다 앞서서 기술했다.

단순 세력만 보더라도 마한은 54개국에 진한, 변한은 24개국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인구수로 보더라도 마한은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를 가져 10만호였고

진한과 변한은 큰 나라면 4~5천호, 작은 나라는 고작 700백호 정도로 하여 진변한을 합쳐서 5만호였다.

즉 마한이 진한과 변한을 합친것보다 두배는 컸다는것.

정통성에서 보면 마한은 초창기 고조선에서 내려와 송국리형 문화를 압도한 이주민,

즉 '한지' 의 선주민 →

고조선 준왕의 '한' 나라 →

준왕 후손 절멸 이후 다시 한인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보이는 진국 → 으로 이어지는

오랫동안 대표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마한의 주축들 역시 기존 한인(韓人)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마한이라고 해도 꼭 종래의 한인만 있던것은 아니다. 다름아닌 백제가 가장 좋은 예다.

image.png.jpg

2.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백제는 기존 한인(韓人)이 아니고 한참 뒤에 북쪽에서 남하한 세력이지만 마한에 속했다.

즉 마한이 무조건 한인으로만 이뤄진것은 아니었지만,

초창기 백제가 마한에서도 딱히 별로 대단할건 없었다는걸 보면

중심으로 가면 갈수록 기존의 한인,

변두리로 가면 갈수록 외지인도 섞이는, 그런 느낌이었던듯 하다.


한편 진한-변한의 경우는 이주민들이 많이 있었고,

마한에게 허락 받고 땅에서 거주하며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이들은 한인(韓人)의 개념에선 처음엔 외지인에 가까웠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한인(韓人)의 개념이 확장되며 여기에 포함되었다.

진한 등에는 위에 삼국지에 나온 노인의 기록처럼 마한과 아예 다른말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옛 고조선 지역인 낙랑군에 남은 사람들을 "남은 우리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아잔(阿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진한에서 나온 염사치는 중국인 납치 노예의 말을 듣고 "한인과 말이 다르다" 는 것을 알았다.

낙랑군 역시 그 뒤 진한에 협박을 할때 자국사람 대신 진한인 출신 염사치를 보내 통역을 시켰다.

중국정권과 진한 역시 딱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것.

즉 수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져 내려오니 거기에 중국인이 어느정도 섞이긴 했지만,

진한의 주축은 중국말을 못하는 고조선계 이주민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2.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환제(146∼167) ~ 영제(168~189)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郡· 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삼국지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영제 말기면 우리가 아닌 '십상시들이 나라 말아먹는' 그 시기다.

이때 고조선 멸망 이후로 시간이 지나며 한인들이 상당히 세력이 토실토실 오르고 있었고,

반면에 중국은 십상시와 영제가 나라를 개판내고 있었으니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변방의 낙랑군 등도 위세가 이때는 많이 약해졌고,

이때 많은 이주민들이 또 한의 땅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일전의 대이주는 고조선의 멸망 때문이었다지만,

이 시기에 내려오는건, "한 땅도 이젠 제법 살만하네?" 싶었다는 뜻도 있었을듯.

과거엔 낙랑군이 협박한번 하자 진한이 바로 숙일 지경이었으나,

여기까지 오니 "군과 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1.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삼한 소국들의 군주는 말이 같은 군주라고 해도 절대 같은 급이 아니었다.

비교적 큰 나라의 군주들은 '신지' 라고 불렸고

그보다 못한 나라의 군주들은 읍차邑借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런 여럿 '신지' 들 중에서도 제법 위세가 대단했던 신지들은, 다른 이름을 쓰기도 했다.

신운고국은 견지보(遣支報)를,

신분고국은 리아불예(離兒不例)

안야국(후대의 안라국)은 축지(踧支)

구야국은(후대의 금관국)은 진지렴(秦支廉)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렇게 뭔가 다른 이름으로 왕들이 불린 나라는 "좀 잘났는데?" 라고 생각해도 되는것.

그러나 이런 이렇게 잘난척을 하는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감히 '왕' 을 칭한 나라는 단 한 나라 밖에 없었다.

image.png.jpg

위에서 살짝 언급한 부분이지만,

마한 목지국의 군주는 스스로 예전 진국에서 따와 진왕(辰王)을 칭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 삼한 땅의 왕처럼 행세하였다.

목지국은 현재 천안에 있었다고 비정되는데,

옛 진국이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목지국이 두각을 나타냈는지는 알수 없으나,

기록으로 봐도 고고학적으로 봐도 2세기 초쯤에는 위세가 매우 대단했다.

BC 2세기 진국 - BC 1세기 고조선 멸망 - (그 사이 비어있음) - 2세기쯤 어느새 목지국 세상

인데, 그 안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건마국이 그때 두각을 나타냈다는 설도 있긴 하다)

어쨌든 2세기 쯤 되면 목지국이 자연스레 삼한 땅에서 굉장히 중심적인 세력이 되어 있었다.

온조왕 10년 가을 9월, 임금이 사냥을 나가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온조왕 12년 가을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온조왕 24년 가을 7월, 임금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여 말하였다.

“왕이 처음에 강을 건너왔을 때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내가 동북의 1백 리 땅을 내주어 편하게 살게 하였다. 이는 왕을 후하게 대접한 것이니, 왕은 마땅히 보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을 크게 쌓고 우리 땅을 침범하려 하는데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부끄러워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혁거세 거서간 38년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이 목지국의 진왕은

초창기의 신라와 백제를 꾸짖기도 하고, 백제 신라에서는 목지국에 공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도읍을 옮길때도 보고를 하기도 했다.

즉, 백제와 신라가 명백히 마한 목지국을 상국으로 모셨던것.

사실 저 기록들은 백제나 신라가 목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징조고,

실제로 저런 일을 한 시기도 기록에 써진것보다 훨씬 후대에 일어난 일로 보이지만,

여하간 기록만 봐도 목지국의 위세가 느껴진다.





4.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그런데 2세기에서 3세기로 바뀌어가면서,

이런 목지국 세상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황건적의 난' 이 일어날 무렵, 요동태수였던 '공손도' 는 갑자기 자립을 해버리고

낙랑군까지 자신의 아래 두게 된다.

그리고 아들인 공손강이 그 뒤를 이어받고는,

낙랑군의 남부지역, 즉 황해도 지역을 분리해서 따로 '대방군' 을 설치하게 된다.

4.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비교적 범위가 넒은 낙랑군에 비해

한반도 남부와 좀 더 달라붙어 있는 대방군.

종종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낙랑군을 견제하는 동시에,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넒이기 위한 묘수였다.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 삼국지

공손강은 자기 부하인 공손모, 장창을 파견해 현지 중국인 유민을 중심으로 병력을 편성하고

한(韓)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행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법 효과를 보게 된다.

다만 복속이라는것이 대방이 실질적으로 전부 때려눕이고 지배했다는게 아니고

한반도 남부 및 일본에서 중국에 사절을 보내거나 할때

이를 중간에서 담당하는 업무를 전부 관할하게 되었다는것.

image.png.jpg

사마의

그러나 대방군의 군사적 활동이야 어차피 한계가 명확했는데,

사실 목지국 입장에서 더 무서웠던건 바로 위나라의 정책이었다.

공손씨 정권은 대방군을 설치한지 몇십년만에 위나라 사마의에게 패망하고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공손씨가 남긴 요동, 낙랑, 대방을 차지하게 된 위나라는

무력 위주였던 공손씨와 달리 은근한 유화책을 쓴다.

여러 소국들 중에서 앞서 말한 강한 '신지' 들에게 정식으로 읍군을 인정하는 인수를 내려주고

읍장의 벼슬을 내려준것.

이렇게 뿌린 인수가 1,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1,000개면 당시 삼한에 있던 유력한 '신지' 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으니,

실제로는 신지뿐만 아니라 다른 읍장들, 혹은 아예 읍장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권위를 위해서 다들 인수를 얻으려 했던 당대의 유행이었던듯 하다.


image.png.jpg

이때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 심지어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이라는 당시의 동인銅印이

실제로 경상도 상주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여간에 생각해보자.

지금 위세가 절정에 달하는 저 멀리 큰나라 위나라에서

나를 정식으로 인정해주고 말뿐만 아니라 증거품으로 인수까지 뿌려준다고 한다.

위나라에서 정식으로 인정 받은 이몸인데,

목지국 왕 늙은이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 것인가?

위나라의 이런 행동은 목지국의 권위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8.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온조왕

한편 목지국의 위세가 절정일때 같은 마한 소속인 백제는 뭘하고 있었을까?

당시 백제를 비롯한 한강유역의 소국들은 '낙랑' 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를 보면 백제와 낙랑의 치열한 전투가 자주 묘사되고, 수도를 옮기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는 백제의 적은 기록을 생각하면 말이 안될 정도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해낸 일들도 그 시절의 백제가 한 세대만에 해낼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다.




때문에 온조왕 시절이라고 써진 당시가 아니라,

백제 성립 직후부터 백제가 역사기록을 남길때까지 200년 가량에 걸친 기록들이라고 보는게 정설이며

훗날 백제가 어느정도 체급이 커지고 채계적으로 역사기록을 남길때,

이런저런 어지러운 기억들을 기왕지사 선조 온조왕때로 소급해서 전부 때려박아 권위를 키웠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백제 기록은 온조왕 때만 어이없을 정도로 많고, 그 이후 왕들은 기록이 형편없이 적은것이다.

온조왕 13년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 백제본기

온조왕 시절에 이런 기록에 있는데, 상당한 영토 확장을 볼 수 있지만 이건 말도 안되는 기록이다.

당장 온조왕 본기만 하더라도 낙랑군, 말갈들과 힘겹게 싸우더니 갑자기 영토가 확 늘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당장 200년뒤에 써진 "삼국지" 의 기록만 보더라도

백제는 여전히 마한의 소국에 불과하고 목지국 세상이기 때문.

때문에 저 기록은 온조왕 때 일은 절대 아니고,

대략 3세기 쯤에 형성되어 백제가 장악하기 시작한 판도로 보고 있다.

삼국지가 쓰여진 직후 쯤에 백제는 여러 소국들을 집어 삼키면서 야금야금 성장하기 시작한것이다.

4.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신라 박혁거세

동시기에 신라는 '사로국' 이었다. 사로국 역시 치열한 시기였다.

1.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기록에 따르면 사로국은 건국직후부터 치열하게 정복 전쟁을 펼치며 계속 확장을 했다.

사로국이 활발하게 여러 진한 소국을 집어삼킨 것 자체는 틀리지 않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3세기 쯤엔 경상북도를 다 집어삼켰는데, 이건 말이 안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173년에 왜의 여왕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비미호는 '삼국지' 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문제는 이 삼국지에는

"영제시절(178-183년)에 왜에 난리가 나서 서로 싸우니

왜인들이 여자 한명을 여왕으로 삼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비미호다." 라고 하는것.

삼국사기에는 173년에 비미호가 사절 보냈다고 하는데 저 시절에 비미호는 왕이 되기도 전이었던 것이다.

즉 신라의 정복 활동 자체는 사실이나, 연대가 꼬여있다. 백제나 신라나 이런게 대부분이라 주의해야 한다.

어찌되었건 다소간의 연대 차이는 있더라도

백제와 사로국이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며 목지국 진왕의 권위는 점점 떨어져간다.

이 과정에서 위에 언급했듯 목지국은 신라에 사람을 보내 "왜 조공을 바치질 않느냐" 고 따지거나

백제에게 항의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가끔 백제가 그런 목지국의 항의에 숙이는 제스쳐를 취하기도 하지만

항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나온다는게 문제였다.

4.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이 무렵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대패시키고

고구려 땅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후 관구검은 부종사 오림이라는 사람을 대방군 쪽에 파견한다.

관구검의 지시를 받고 온 오림의 의도는

본래 대방군이 업무를 관할하던 진한 쪽 8개국의 관할을 낙랑군 쪽으로 다시 바꾸려는것.

즉 해당 국가들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이런 일을 할때 대방 대신 낙랑을 통하라는것이다.

아무래도 대방군은 망한 공손씨의 영향력이 남아있을만하니

좀 더 낙랑군을 키워주기 위한 의도였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의도에 따라 오림이 왔는데,

이때 통역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여

말을 잘 못 알아먹은 어떤 한 국가의 '신지' 가 격분하게 된다.

대체 통역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지만,

대방군의 관할을 바꾸는 과정으로 시작한 일이,

갑자기 이 '신지' 소속의 나라가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치는 일로 바뀌게 된다.

4.jp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이 밑도 끝도 없는 난장판 사태는 그냥 작은 해프닝 정도가 아니었는데,

대방의 태수 궁준, 낙랑 태수 유무가 손을 잡고 토벌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방 태수 궁준은 아예 전사하기까지 했고

이런 악다구니 끝에 대방, 낙랑 2군은 이 한(韓)국을 아예 멸망시킨다.

통역 실수로 일어난 어이없는 일 정도로 치부하기엔 양쪽 모두 엄청난 타격을 입은 대전투였던 셈.

이때 통역 실수로 '기리영 전투' 를 일으킨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는 백제설이 있었으나, 기록을 보면 대방, 낙랑과 싸운 이 나라는 아예 망했다.

그러나 백제는 망하지 않았으므로, 예전부터 비판 받은 설이었다.

그래서 두번째로 나온게 목지국 설이다. 목지국이 전투에서 "망했다" 는 소리 들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고

그 결과 헤게모니를 넘겨주었다는것.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목지국은 대방-낙랑과 한판 하기에는 상당히 남쪽에 있다.

일단 싸우는것 자체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 과정에서 훨씬 남쪽의 목지국이 망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는데,

그보다 북쪽의 백제는 어째서 멀쩡한것인가?

비교적 최근에 나온것이 신분고국설(臣濆沽國)이다.

원래 사료대로라면, 위에 언급한대로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 대방을 친것인데,

이 "신지격한분(臣智激韓忿)" 이라 써진 삼국지는 명나라 이후 판본이었고,

더 예전 판본을 들여다보니 신지첨한분(臣知沾韓忿), 신지한첨이 분노하여 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는것이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삼국지 필사본을 들여다보니 거기서는 아예

"신분고한분(臣濆古韓憤)" 신분고한이 분노하여가 되는것.

그런데 이 신분고한이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라,

삼국지를 보면 당시에 "신분고국(臣濆沽國)" 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었다.

위에 "힘이 쎈 나라들은 자기네 군주를 신지라고 했는데,

그런 보통 국가들보다도 더 힘이 쎈 군주들은 또 다르게 불렀다." 고 할떄 설명했듯,

이 신분고국은 군주를 "리아불예(離兒不例)" 따로 부를 정도로 큰 나라였다고 한다.

거의 환상적으로 모든것이 맞아떨어져, 현재는 이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신분고국을 보는것이 유력해졌다.

이 신분고국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경기도 어딘가로 보고 있다.

즉, 원래대로라면 백제는 바로 근처에 "리아불예" 라는 이름을 따로 쓸 정도로

강한 이웃이 붙어 있는, 매우매우 불편한 상태였던것.

그런데 이 나라가 통역실수로 인해 갑자기 개빡쳐서 급발진하여

낙랑 대방에 단신으로 들이박아 상당한 타격을 주고 알아서 멸망한것이다.

백제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그전까지 야금야금 힘을 키우던 백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3.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image.png.jpg

중국 삼국시대는 진나라 사마염의 대에 통일되며 끝나며, 이 사마씨의 진나라를 '서진' 이라고 한다.

서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마한의 왕"이 200년대 후반, 즉 3세기 중후반에 사절을 자주 보냈다.

이런 사절 교류의 영향으로 들어왔을 3세기 서진 양식의 도자기등은, 유독 한성백제의 영역에서 보인다.

즉 실제로 저때 마한의 왕을 칭하며 서진과 교류한 주체는 사실 백제였다.

백제가 목지국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온조왕 26년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의 온조왕 본기를 보면 온조왕 26년에 마한을 쳤다고 나오는데,

온조왕 26년이면 기원후 8년이다.

저때 마한(목지국)을 쳤다는건 위에서 언급하듯 말도 안되는 소리고

아마도 삼국지가 막 저술되고 난 이후인 3세기 중반쯤일 것이다. 바로 이 무렵, 목지국은 옛 신하국 백제에 의해 멸망한다.

온조왕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죽였다.

- 삼국사기 백제왕 본기

목지국의 장수 중에 "주근"이라는 인물은 치열하게 저항했는데,

백제는 주근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처자까지 죽이면서

목지국의 유신들에게 단호한 뜻을 보인다.

주근의 일화대로라면 목지국이 망할 시점에도 아직 목지국을 따르는 영향력이 있었다는 소리가 되니

이를 말소하기 위해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것.

실제로 백제는 원래 자신들의 주인같은 입지였던

이 목지국에 대해 아주 가혹하게 대한다.

일단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복속된 후, 목지국은 매우 쇠퇴했으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거기서도 백제는 만족을 못하고 4세기 경, 목지국을 완전히 해체시켜버려

그토록 영화를 누린 목지국의 기반은 백제 내에서 완전히 분해되어버렸다.

남은 문헌적인 기록도 "반역자" 주근을 잔혹하게 대해서 엄포를 놓았다는 것 뿐.

그 이후 백제가 포섭한 남쪽 지방의 여러 소국은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포섭된 후에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는것을 보면, 목지국에 대해서는 백제는 유독 강하게 나간편이다.

이렇게 한반도 땅 최초의 "패자", 다른국가들을 정복하진 않더래도 맹주의 지위를 가졌다는 입장에선

정말로 춘추오패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목지국은 멸망했지만

마한의 다른 나라가 전부 망한것은 아니었다.

마한은 위에 언급한대로만 해도 정말로 뿌리깊은 정통을 가지고 있었고,

서진에 사신을 보낸 백제까지도 목지국을 쳐놓고 여전히 마한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백제가 "백제"의 이름으로 중국과 외교한건, 근초고왕까지 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한의 원류는 매우 순수한 한(韓)인들로 이루어졌다.

반면 백제는 거기에 비하면 마한 소속이더래도 북에서 내려온 이주민 집단이었다.

진국 때부터 여기까지 시대가 흐르면 너무 예전이라 선주민과 이주민의 인식 자체는 거의 약해졌을 수 있어도

자기들도 기억이 희미한 뿌리깊은 관념속에서는 "변방 족속들" 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변방 촌것들이 목지국 진왕을 죽이고 유서깊은 마한의 맹주를 참칭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만하다.

image.png.jpg

2.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백제가 진나라에 "마한" 의 이름으로 사절을 보내고 있던 200년대 후반,

진나라에 또다른 "마한" 의 사절이 도착한다.

‘동이마한(東夷馬韓)의 신미(新彌) 등 여러 나라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유주(幽州)에서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 국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幽州四千餘里曆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

- 진서 장화 열전

"신미제국新彌諸國" 즉 신미 외에 여러 나라諸國들이 사절을 보냈는데,

이 나라들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이다.

진나라에서는 이들을 "마한" 이라고 파악했다.

이들은 "일본서기"에서도 나오는 이들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침미다례(忱彌多禮)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전라도 지역에 있던 마한 국가들이다.

백제는 목지국을 삼킨 후에도 점차 남쪽으로 영향력을 넒였지만, 전라도 지역까지 병합한것은 아니었고,

전라도 지역에서 "침미다례"는 연맹체로서 백제에 대항하는 마한 세력이 되었다.

image.png.jpg

1.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목지국이 망했다고 마한이 다 복속된것은 아니었기에

삼국사기에서는 백제본기에서 "마한이 망했다' 이후로

뜬금없이 "고구려본기" 에서 고구려의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을 거느리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백제본기>를 쓸적에 김부식은 백제 쪽 자료를 참고했을텐데,

백제인들은 백제가 한때 마한을 상국으로 모신것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생각이었는지

혹은 백제가 여러 난립하는 마한소국들 중에 하나였던 사실을 줄이고 빠르게 강성한 나라로 묘사하려는 생각이었는지

"온조대왕님 있을적에 잠시 마한에 예의를 차린적이 있긴 한데 우리 온조대왕때 마한 최대한 빨리 평정해버렸다."

라는 식으로, 마한평정을 온조왕때로 끌어올려 최대한 빨리 치워버리고 그 뒤로 일언반구 언급을 안했다.

때문에 백제본기에서는 서기 16년 이후로는 마한은 언급도 안되는데

고구려쪽 자료를 인용한 <고구려본기>에서는

밑도 끝도없이 망했다는 마한이 100년뒤 고구려 태조왕과 같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당황한 김부식은 "마한은 분명 망했다고 했는데, 다시 부활한건가?" 하고 당황해한다.

실제로 전라도 지역의 "침미다례" 까지 백제가 타격을 주며 복속 시킨것은 근초고왕 시기가 되어서였다.

물론 당연히 백제쪽 자료는 아니고,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 것.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가 "남만(南蠻)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고 나온다.

또한 이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비지(布彌支)·반고(半古) 4읍이 항복했다." 고도 이야기한다.

저 4지역은 확실하진 않지만

벽중은 보성, 포비지는 나주로 보통 보고 있으며, 나머지 두 지역도 전라남도 지역으로 본다.

일본서기에서는 "왜가 백제에게 주었다" 고 나오는데, 저 기록은 보면 알겠지만

침미다례를 "남만" 즉 남쪽 오랑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왜의 입장에선 침미다례에게 다른 흉악한 말은 다 쓰더라도 "남만" 이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일본사람이 전라도 사람보고 남쪽오랑캐라고 할 일이 대체 뭐가 있는가?

때문에 실제 주체는 백제이고, 단지 일본서기 특유의 기술로 보인다.

저때 기록을 보면 백제인들은 자신들에게 아직도 복속하지 않는 침미다례를

"남만 오랑캐들" 이라고 멸시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image.png.jpg

1.PNG 고조선이 있던 시절, 바로 "이 땅" 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면 어쨌든 근초고왕이 활동한 4세기에는 침미다례도 복속했고

마한이 전부 정복당하고 끝난걸까?

일단 문헌사학계는 그렇게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고고학계는 의견이 많이 다르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옹관묘라는 특유의 매장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백제와는 확연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옹관묘 문화는 5세기 후반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백제문화로 바뀌는 것은 6세기까지 가서야 가능했다.

즉 이를 통해 실제로 마한이 완전히 복속된것은 훨씬 후대인 '동성왕' 시절로

498년 동성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질 않아 임금이 직접 치려고 무진주(광주)까지 이르렀을때

제대로 복속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절충을 해보자면 근초고왕 시절 침미다례를 중심으로 남부 마한세력은

군사적으로는 더는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시점에서 이미 남은 마한 세력은 군사적으로는 백제에 두번 다시 대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백제의 '간접지배' 영역에는 들어왔으나

막상 군사문제가 아닌 행정적인 문제로 백제가 이 지역을 '직접지배'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비교적 느슨하게 이어져있다가

100여년이 넘도록 시간이 걸린 끝에야 백제가 여기서 확실하게 판도에 넣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여하간에 369년 3월 침미다례 복속을 끝으로,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시대"는 끝을 맞이한다.

이보다 앞서 북방에서 고구려는 313년 낙랑군을, 314년, 대방군을 점령하였고

이제 한반도 땅에서 중국계 세력은 사라지고, 백제와 고구려는 국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로 쳐들어오며, 백제와 고구려의 첫 군사적 접촉이 일어난다.

그리고 양국의 이 첫 접촉이, 서로가 서로의 왕을 죽이는 대혈전의 시대로 이어지게 되는데,

"고구려 - 백제 - 신라" 의 새로운 "삼한시대"로 판도가 바뀌게 된다.

출처 : https://www.fmkorea.com/4368150613

옆동네 글인데 내용이 흥미로워서 퍼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덕질 공통 이용규칙 및 안내 (업데이트중+ 2024-04-13) 😀컴덕824 2024.04.14 5343
공지 1000P를 모으면 다이소 상품권 1000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file Private 2024.02.14 5317
12523 힘을 숨긴 주치의 file 😀익명651 2023.11.19 8
12522 힐러리가 트럼프 상대로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 file 😀익명871 2023.10.30 962
12521 히틀러의 연설 file 😀익명576 2023.11.13 288
12520 히틀러의 연설 file 😀익명565 2023.11.12 256
12519 히틀러의 연설 file 😀익명030 2023.10.12 839
12518 히틀러의 사상 행적 중 가장 의외인 부분 file 😀익명199 2024.02.10 329
12517 히틀러의 기미상궁이였던 여인 file 😀08910756 2022.01.22 32
12516 히틀러와 직접 인연이 있었던 유대인들 file 😀75817779 2022.02.18 27
12515 히틀러도 감탄할 소년병 훈련 file 😀익명540 2024.01.15 606
12514 히틀러가 평가한 각국 군대 file 😀23046993 2021.08.24 21
12513 히틀러가 일본에게 선물로 준 요요 비슷한 무언가. file 😀익명815 2023.09.07 364
12512 히틀러가 사용하던 집무실 file 😀익명687 2023.01.28 3602
12511 히틀러가 미대 입시 떨어진 이유 file 😀익명694 2023.04.25 53
12510 히틀러가 미국을 경계한 이유.jpg file 😀익명955 2024.03.12 422
12509 히틀러가 미국을 경계한 이유 file 😀익명200 2024.03.14 636
12508 히틀러가 말하는 남녀평등 file 😀22512165 2021.12.20 38
12507 히틀러가 계획한 역대급 대규모 프로젝트 ㄷㄷㄷ..jpg file 😀익명211 2023.08.10 375
12506 히틀러가 계획한 대규모 프로젝트 file 😀익명441 2023.04.14 1855
12505 히틀러 총통 관저 구경 file 😀87010834 2022.04.08 264
12504 히틀러 암컷 타락 대작전 file 😀60616522 2022.05.12 34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627 Next
/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