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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쿠건(1914-1984)
그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키드>에 출연해 아역 배우로서 많은 인지도와 최초의 할리우드 아역 배우라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
본명은 존 레슬리 쿠건(John Leslie Coogan)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1914년 10월 26일, 헨리 쿠건과 돌리버 쿠건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보드빌과 영화에 나왔었고, 채플린이 보드빌 하우스 오르페움 극장에서 어깨춤을 추던 그를 발견해 조연으로 캐스팅한걸 시작으로, 더 키드(1921)에서 버려진 소년 역과 1922년 프랭크 로이드 감독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맡으며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비록 성적 탓에 산타클라라 대학을 중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1935년 21살에 나이에 그는 교통 사고로 본인을 제외한 아버지, 친한 친구 더킨, 목장주 호너 씨 등을 잃었다.
아역 스타로서, 쿠건은 약 3백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2021년 달러로 4400만 달러에서 5900만 달러)를 벌었다. 그가 1935년 10월에 21살이 되었을 때, 그의 재산은 그대로인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의 자산은 5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의 아버지에 의해 보수적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건은 곧 모피 코트, 다이아몬드 및 기타 보석과 값비싼 자동차에 돈을 쓴 그의 어머니와 계부 아서 번스타인에 의해 그가 벌은 거의모든 금액이 낭비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번스타인은 가족의 재정 고문이었고 1936년 말에 쿠건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쿠건의 어머니와 계부는 재키가 영화를 찍는 것을 단순히 그가 카메라 앞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재키에게 아무것도 주겠다는 약속은 없었다"고 주장했고, 번스타인은 "나쁜 소년이었다"고 주장했다. 쿠건은 1938년에 그들을 고소했지만, 그의 법적 고소 이후, 그는 남은 수입의 25만 달러 중 126,000달러만 받았다. 쿠건이 소송 중에 파산했을 때 그는 찰리 채플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채플린은 주저 없이 그에게 1,000달러의 현금을 건네주었다.
법적 싸움은 아동 배우에 초점을 맞추고 1939년 캘리포니아 아동 배우 법안의 제정으로 이어졌고, 이를 쿠건 법이라 부른다.
아동 배우의 고용주는 수익의 15%를 신탁(쿠건 계좌라고 함)에 확보하고 배우의 학교 교육, 근무 시간 및 휴가를 지정해야 한다는 것이 법의 주요 골자이다.
아담스 패밀리의 페스터 삼촌 역으로도 그는 유명했다. 이렇게 아역 배우에 대한 인권 신장에 획을 그은 그는 비록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은 법에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