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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타케오주 주민들이 묘사한 크메르 루주 시절을 묘사한 그림

 

 

https://asia.nikkei.com/Politics/40-years-from-Year-Zero-Cambodia-s-young-wrestle-with-dark-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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헴 치우 (ហែម ចៀវ Hem Chieu 1898~1943)

 

"캄보디아인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는 번영할 걸세"

(ដរាបណាខ្មែរលែងមានគំនិតក្តិចខ្មែរ ដរាបនោះជាតិយើងនឹងបានរុងរឿងមិនខាន។)

(캄보디아어 위키백과의 헴 치우 항목 참고함)

 

캄보디아 교수, 상좌부 불교 승려,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193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식민 당국이 캄보디아인들의 민족성을 억제하기 위해

캄보디아어의 문자인 크메르 문자 대신 로마자로 바꾸려는 시도에 매우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었고,

인도 독립운동가 간디의 방식과 비슷하게 비폭력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그로 인해 이념과 독립운동 방식을 막론하여 캄보디아인 모두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 당시 같은 프랑스 식민지였지만 무력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이웃나라 베트남

그리고 내륙국+산지 지역이라는 특성상 독립운동은 적었지만 게릴라 활동에 집중했던 라오스에 비하여

캄보디아의 독립운동은 헴 치우의 방식대로 비폭력 독립운동에 힘써서, 1930년대까지는 대놓고 탄압하진 못했지만

 

1941년부터 일본의 캄보디아 침공과 함께 기존의 프랑스 식민정부가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 비시 프랑스 식민정권으로 교체되자,

무력 독립운동이든, 비폭력 독립운동 모두를 가리지 않고 캄보디아 독립운동가들이라면 전부 체포하여 감옥에 투옥시켰다.

 

캄보디아 독립운동가들이 비시 프랑스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헴 치우는 1942년 7월 20일, 상좌부 불교 스님들과 함께

캄보디아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으나, 그 결과는 비시 프랑스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그 즉시 캄보디아인 모두가 강력히 저항하자 종신형으로 감형했지만, 그 대신 캄보디아에서 제일 열악한 감옥에 투옥시켰다.

 

감옥에 투옥된 이후로도 헴 치우는 캄보디아 독립운동가 모두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그 결과 1943년 감옥 간수들의 무지막지한 박해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헴 치우의 유언은 모든 캄보디아 독립운동가들이 헴 치우 본인의 죽음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고,

계속 꾸준히 정진하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헴 치우는 캄보디아 왕국 1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1922.10.31~2012.10.15) 시기에도, 크메르 공화국 시기에도

좌우를 막론한 캄보디아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로 추앙받았고, 이는 현대 캄보디아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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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4대 승왕 추온 나스 (ជួន ណាត Chuon Nath 1883.3.11~1969.9.23 승왕 임기:1947~1969.9.23)

승왕에 대해 모를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상좌부 불교를 믿는 왕국에서 왕이 정하는 불교의 수장이라 보면 된다.

 

"내가 사리탑과 관련된 꿈을 꾼 건 이번 불교위원회에 좋은 징조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ត្រង់ ដែល អាត្មា យល់ សប្ដិ ឃើញ ចេតិយ នោះ ប្រហែល ជា និម្មិត្ត មួយ ប្រផ្នូល ឲ្យ យើង ដឹង ថា គណៈ កម្មការ ធម្មវិន័យ របស់ យើង នឹង បាន សម្រេច ដោយ ល្អ”)

(캄보디아어 위키백과의 추온 나스 항목 참고함)

 

근현대 캄보디아 역사상 제일 존경받는 승왕.

그는 모국어 캄보디아어뿐만 아니라

태국어, 라오스어, 미얀마어, 싱할라어 (스리랑카의 국어) , 몬어 (동남아시아 소수민족 몬족의 언어) ,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하였고,

약간의 베트남어를 할 줄 알았으며, 불경 번역에 필수적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하였다.

 

프랑스 식민지배 당시 불교 개혁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전륜성왕과도 같은 특유의 언어적 재능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 운동에 힘써 팔리어 불경을 캄보디아어로 번역하였고,

1930년대부터 프랑스 식민당국이 프랑스어로 된 외래어 도입, 캄보디아어 문자인 크메르 문자 대신 로마자로 바꾸는 시도를 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프랑스어로 된 외래어 대신 팔리어 및 산스크리트어 어원을 따와 캄보디아어로 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언어순화운동인 "크메르화" 운동을 하였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어에선 기차를 뜻하는 단어가 Ayak-smey-yean 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및 팔리어로 철을 뜻하는 Ayomoyo 그리고 캄보디아어로 수레를 뜻하는 Yana 의 합성어이다.

 

추온 나스의 언어순화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1919년부터 편찬을 시작한 캄보디아어 사전을 발판으로

1938년에 캄보디아어로 된 서양 문물들의 단어가 포함된 현대 캄보디아어 사전을 완성했다.

1941년엔 현대 캄보디아의 국가 (國歌) 인 "왕국" (បទនគររាជ Nokor Reach) 의 가사를 작성했다.

그 덕에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과 캄보디아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상좌부 불교 신자들의 강력한 지지로 1947년부터 승왕이 되었다.

승왕이 된 이후에도 캄보디아인들의 교육과 캄보디아의 복지에 힘썼으며, 전 국가적인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1969년 9월 10일 추온 나스는 신기한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불탑을 보았는데, 본인이 불탑 쪽으로 다가갈수록 그 불탑이 작아지는 꿈이었고,

뒤에서 다른 불탑이 추온 나스 쪽으로 움직이는 꿈이었다.

하도 희한한 꿈이라 눈을 떠보니 새벽 4시였다.

 

1969년 9월 13일, 추온 나스는 팔리어 경전 및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정리한 뒤, 연설을 하고 제자들과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해당 유언이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1969년 9월 23일 추온 나스는 이상한 종소리와 함께 입적하였고, 이는 1년 뒤, 캄보디아 근현대사의 불길한 시작을 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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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이 흐릿해서 그렇지, 동일인물이다.

 

캄보디아 크메르 공화국 총리 시소와스 시릭마탁 ( Sisowath Sirik Matak ស៊ីសុវត្ថិ សិរីមតៈ 1914.1.22~1975.4.21)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 남아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볼 것이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 남을 것이다."

(Man is born to die. I will not move. I shall stay here and face everything that happens.

They can arrest me. If they kill me, what of it? I stay for my country.)

(영어 위키백과의 시소와스 시릭마탁 항목 참고함)

 

캄보디아 반공 왕족으로, 절대왕권을 휘두르며 캄보디아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미국, 소련, 중국 사이에서

어물쩡어물쩡 간보는 외교로 나라를 고립시킨 캄보디아 왕국 1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의 친척이었으나

노로돔 시아누크의 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여 크메르 공화국 1대 대통령 론 놀 (1913.11.13~1985.11.17) 과 함께 1970년 3월 18일,

쿠테타로 노로돔 시아누크를 몰아내고 크메르 공화국을 세운다. 시소와스 시릭마탁은 론놀을 보좌하는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건국의 순간도 잠시, 중국의 지원을 받은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내전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미친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랑 손잡고 크메르 공화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소와스 시릭마탁은 론놀 휘하에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상관 론놀에게 수많은 조언을 했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론놀은 이 조언들을 듣지 않았고, 따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론놀이 호찌민 루트 소탕을 위해 캄보디아 내의 미국 폭탄 투하를 허가했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의 민심은 권력욕에 미쳐 날뛰던 노로돔 시아누크와 미치광이들 천지인 크메르 루주의 편을 들게 된다.

 

결국 크메르 공화국은 1975년 4월 17일에 멸망하였고, 론놀을 포함한 크메르 공화국 인사들은 외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하지만 시소와스 시릭마딱은 자신의 운명을 크메르 공화국과 함께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4월 21일, 크메르 루주에게 처형당한다.

 

이후 캄보디아의 운명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북한보다 더한 생지옥이 되었고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1/4인

최소 200만,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1/3인 최대 300만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하였고,

그 중에선 노로돔 시아누크의 아내 1명, 자식 5명도 있었다.

우익, 반공 성향의 캄보디아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로, 상관을 잘못 만났고, 정적들도 잘못 만난 비운의 인물이다.

 

 

 

https://spktliv.com/archives/8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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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의 전신인 캄푸치아 공산당원 후 님 (Hu Nim ហូ នឹម 1930 또는 1932.7.25~1977.7.6)

 

"나는 캄푸치아 공산당 외에 의존할 것이 없다. 부디 당이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란다"

( I have nothing to depend on, only the Communist Party of Kampuchea. Would the Party please show clemency towards me)

"나는 인간이 아니다, 동물이다"

( I am not a human being, I am an animal)

(영어 위키백과의 후 님 항목 참고함)

 

폴 포트 입당하고 나선 살인에 미친 새끼들밖에 없었던 캄푸치아 공산당 내에서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고 온건했던 인물로,

폴 포트 등장 이전에도 명성이 높아, 북베트남, 중국과의 외교적 우호에 힘썼고,

노로돔 시아누크 측에서도 잠깐 자기네들 편으로 포섭하려 했던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크메르 공화국 멸망 이후,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가 건국한 뒤,

화폐를 폐지하고, 도시를 무인화하는 미친 정책을 시도하자,

성씨가 비슷한 후 유온 (Hou Yuon ហ៊ូ យន់ 1930~1975) (캄보디아어로는 성의 모음이 미묘하게 다르다) 과 함께 맹렬히 반대하였고,

결국 이 때문에 후유온, 후님은 크메르 루주에게 처형당하고 만다.

 

후유온과 함께 괜히 공산당에 입당하여 죽은 인물이다.

공산당에 입당하는 쓸데없는 짓 말고,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좌파였다면 훨씬 나았을 인물이다.

후님이 죽기 전에 자신을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 자아비판한 것도, 캄푸치아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 대한 후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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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캄보디아 5대 승왕 홋 땃 (Hout Tat ហួត តាត 1893.2.1~1975.4.18 승왕 임기: 1969.9.25~1975.4.17)

 

"동포 여러분들은 환상에 빠지지 마시고 부디 내전을 중단하십시오.

자유는 반드시 올 것이며, 조국은 평화롭고 국민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단합하여 이 나라를 재건할 것입니다"

( "Đồng bào không nên hoản sợ, xin ngừng nội chiến,

độc lập nhất định sẽ đến, đất nước ta sẽ hòa bình, dân chúng không khổ lầm than nữa,

chúng ta đoàn kết xây dựng lại đất nước"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홋 땃 항목 참고함)

 

캄보디아 4대 승왕 추온 나스와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캄보디아 근현대사에서 추온 나스 다음으로 존경받는 승왕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승왕이다.

 

그는 스승 못지않게 여러 언어에 능통했는데, 불경 번역에 필수적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태국어, 라오스어에 능통하였고, 특히 고대 크메르 문자 해석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 덕에 17세부터 근현대 캄보디아 1대 승왕 닐 텡 (និល ទៀង Nil Teang 1824.7.4~1913.10.2 승왕 임기: 1858~1913.10.2) 에게

꾸준한 관심을 받은 걸 시작으로 1919년엔 캄보디아어 사전을 편찬하는 위원회의 일원에 참가하였다.

캄보디아어 사전을 편찬하는 위원회의 일원에는 스승인 추온 나스도 있었다.

 

그렇게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신자들에게 4대 승왕 추온 나스의 차기 후계자로 예상되었고,

그 예상대로 5대 승왕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캄보디아 왕국에서 크메르 공화국으로 왕정이 잠깐 폐지되었지만,

크메르 공화국 우파들은 캄보디아인들의 민족종교인 상좌부 불교에 함부로 해를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좌부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승왕 신분과 신변에 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크메르 공화국 건국 이후 캄보디아 내전이 발생했지만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상좌부 불교 역사를 정리, 요약하는 데 힘썼고, 크메르 루주 공산 반군들을 억제하는 데도 힘썼다.

 

하지만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공화국이 멸망했고, 그 이후로 모든 캄보디아인들에게 지옥보다 못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홋땃은 크메르 루주 반군 앞에서도 환상에 빠지지 말고, 부디 내전을 중단할 것을 명했으나,

크메르 루주 반군들은 캄보디아 캄퐁스페우주 우동시로 홋땃을 끌고 가서 모욕하고 구타했다고 한다.

 

1975년 4월 18일 크메르 루주는 승왕 홋땃을 문자 그대로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홋땃의 동상은 메콩 강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킬링필드 당시에는 약 25000명 이상의 불교 스님들이 학살당했고, 불교 사원 1968개가 크메르 루주에게 파괴당했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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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바오로 뗍 임소타 항목

 

근현대 캄보디아 천주교 사제 겸 1대 바탐방 지목구

바오로 뗍 임소타 사마스 (Paul Tep Im Sotha Samath ទេព អ៊ីមសុត្ថា 1934.4.20~1975)

여기서 지목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바티칸에서 직접 관리하는 지역의 천주교 수장이라 보면 된다.

 

"오늘 저는 33세로,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입니다"

("Aujourd’hui, j’ai 33 ans, l’âge du Christ à sa mort")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바오로 뗍 임소타 항목 참고함)

 

 

세례명은 바오로, 본명은 뗍 임소타.

 

1934년 중국계 캄보디아인과 프랑스계 베트남인 사이의 혼혈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교육을 받아 신부가 될 계획이었다.

 

그 결과 1959년부터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1961년엔 프랑스어로 캄보디아의 천주교 역사를 적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 덕에 1968년 9월 26일부터 당시 교황 바오로 6세 (1897.9.26~1978.8.6 재위: 1963.6.21~1978.8.6)

 

바탐방주를 프놈펜의 사도교구로부터 분리하고 뗍 임소타를 바탐방 지목구로 임명하였다.

 

임명 후에는 캄보디아 천주교인 중에서 캄보디아 사회를 제일 잘 이해하며, 주님의 어린 양들을 잘 이끌어간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975년 초 유럽 지역을 방문했지만, 모국이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3월 17일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바탐방주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피하는 역할을 맏았고,

 

당시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는 프랑스 신부 장 바드레 (Jean Badré) 에게 태국으로 도피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장 바드레가 권유를 거절하자, 자신도 프랑스 신부 장 바드레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하였고,

 

1975년 4월 20일, 바탐방 성당의 마지막 미사를 진행하였다. 미사를 마칠 때 자신의 나이가 33세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뗍 임소타의 유언이 되었다.

 

 

 

미사 이후에도 성당을 복구하는 등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지만, 1975년 4월 말, 크메르 루주 병사들에게 총을 맞고 선종한다.

 

최후에는 캄보디아 반테아이메안체이주 시소폰의 "유온" 다리 말뚝에 머리가 박힌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온 យួន Yuon 은 캄보디아어로 베트남인을 비하하는 말)

 

40년 뒤, 2015년 5월 1일 바오로 뗍 임소타 사마스는 시복을 받은 캄보디아 천주교 신자 35명 중 한 명이 되었고,

 

2015년 5월 8일부터 바탐방 천주교 신자들은 바오로 뗍 임소타 사마스를 추모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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