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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러울수도 있는 사진이 포함되었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정오.
월남 사이공의 도심에는 총통 즈엉반민의 항복 발표가 울러퍼졌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는 반공주의자들이 활동을 시작하여
북베트남을 몰아내려고 하였지만
이튿날 남베트남 혁명정부는
'현재 새롭게 탄생할 혁명정부의 목표인 민족화합과 진정한 통일이 요원하다.'
라는 명목으로 전국 150군데에 재교육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아침부터 정신교육을 받는 학생들)
수용소 입소자는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1.괴뢰(월남) 군인:중위 이상의 장교 및 행정관
2.괴뢰정부 공무원:경찰,사법부,행정부
3.괴뢰당원:지구당 이상의 당원과 조직의 핵심인물
4.항복 및 배신자:탈북자,간첩,대북선전 활동가
*종교인,지식인,작가,언론인 등은 특별입소 당함.
'재교육'이란 명목으로 입소한 시민들은
가족배경,살아온 인생,친척 관계,정치성향,연도별로 어디서 살았는지 등을
20페이지 분량으로 꼼꼼히 작성해야했다.
하지만 입소자의 신상은 이미 다 파악되었기 때문에
굳이 처음부터 꼼꼼히 쓸 필요는 없었다.
조사관은 작성된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
'성실성 부족,자아비판 부족,반동적,괴뢰활동 은폐'
등의 이유로 수차례 다시 적어오게 하였다.
서류가 통과되면 수용소 측이 가지고 있는 자료와 대조하며
세부사항을 확인하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입소여부를 심사한다.
입소를 기다리는 시민들.
재교육프로그램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괴뢰정부와 미제의 만행.
베트남 공산당의 업적과 위대함.
위대한 사회주의 내용을 알아보기.
그리고 정신교육 시간마다 '자아비판서'라는걸 밤새도록 작성하게 하였고 사람들 앞에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보고식에서 열렬히 자아비판을 한 교육생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용소의 실상과 총살당한 교육생
월맹들에게 있어선 월남의 군인들과 공무원을 모아논 재교육 수용소는 복수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노동은 영광스럽다'라는 외침과 함께 하루 8시간의 강제노동이 시행되었는데,
주로 나무를 캐거나 교육생들이 먹을
작물을 기르며 땅을 갈거나 우물을 파거나 전쟁중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매일 매일 교육생들이 달성하기 힘든 할당량이 주어져
굶주리는 교육생들이 많았으며, 사는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베트남의 경제난과 수용소의 식량 보존시설의 열악함이 겹치면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교육생이 수도없이 많았다.
교육생들은 월남 정부를 위해 일한 시간에 비례하여 최소 3년에서 15년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월남인들의 ⅓은
친적이 재교육수용소에 수감된 이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철저하게 2등국민으로 분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