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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입성한 베트콩 탱크의 모습
1975년 4월 30일, 베트콩 탱크는 남베트남 사이공 대통령궁에 입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베트남은 완전히, 그리고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해외 역사가들은 이를 사이공 함락 (Fall of Saigon) 이라 말한다.
사이공 함락 이전 남베트남 장성들을 포함한 남베트남 고위층 대부분은 해외로 망명하였지만,
남베트남 장성 5명은 멸망하는 남베트남과 운명을 함께하였는데, 해당 남베트남 장성들은 이와 같다.
쩐반하이 (Trần Văn Hai 1925~1975.5.1)
레응우옌비 (Lê Nguyên Vỹ 1933.8.22~1975.4.30)
응우옌코아남 (Nguyễn Khoa Nam 1927.9.23~1975.5.1)
레반흥 (Lê Văn Hưng 1933.3.27~1975.4.30)
팜반푸 (Phạm Văn Phú 1928.10.16~1975.4.30)
남베트남 장성들의 유언과 함께 그들의 간략한 생애를 설명하겠다
쩐반하이 준장
"마지막 시간 동안 자네가 옆에 있어 주어서 고맙군.
나라가 이렇게 끝났으니 우리들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우리들은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네."
(“Anh cám ơn em đã ở bên cạnh anh trong giờ phút cuối cùng này.
Vận nước đã đến hồi như vậy, không thể làm gì hơn được.
Là quân nhân chúng ta phải tuyệt đối chấp hành lịnh thượng cấp”.)
"자네는 내일 아침 일찍 가족에게 가도 괜찮네. 나는 자네에게 이 짐을 나의 어머니께 드리라고 부탁하겠네,
내 어머님께는 선물이라 말씀드리고 아들의 생사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드리게.
이제 막사로 돌아가서 짐을 챙겨도 되네,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밤까지 연락하겠네."
(“Sáng sớm ngày mai, em có thể trở về với gia đình.
Anh nhờ em đưa gói đồ này cho mẹ anh và nói với bà rằng, đây là quà của anh gởi cho bà và bảo bà đừng lo lắng gì cho anh cả. Bây giờ em có thể về doanh trại thu xếp đồ đạc, từ giờ đến tối lúc nào cần anh sẽ gọi”.)
1925년 1월에 껀터시에서 태어났고, 1952년부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68년부터 사이공 쩌런시의 베트콩을 섬멸한 공로로 군인 겸 경찰청장이 되었으며,
동시에 남베트남 육군 제7보병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제7사보병단 사령관 복무 당시에는 다른 남베트남 장성들과는 달리 부정부패와 거리가 멀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휘하 장병들에게 좋은 상관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사이공 함락 일주일 전, 남베트남의 2번째 대통령이자 사실상 마지막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 (Nguyễn Văn Thiệu 1923.4.23~2001.9.29) 가
같이 외국으로 피신하자고 전용기까지 보냈으나, 쩐반하이는 자신의 처자식들만 전용기에 태우라고 당부했고,
본인은 군 기지에 남기로 결정한다.
사이공 함락의 날인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공식적인 마지막 대통령 즈엉반민 (Dương Văn Minh 1916.2.16~2001.8.6) 이
북베트남에 항복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베트남의 모든 군대는 즈엉반민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쩐반하이는 군 기지에서 본인과 가장 가까웠던 휘하 장병에게 어머니께 드릴 마지막 선물이 담긴 짐을 주었고,
이 짐을 챙기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물하라고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내일 아침인 1975년 5월 1일, 쩐반하이는 군 기지에서 쩐반하이의 유가족들과 휘하 장병 1명에게 약물을 복용하며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고, 그의 시신은 북베트남군 병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처음에는 그의 유가족들과 휘하 장병을 저지했지만, 쩐반하이의 모친이
"자네, 이 어미에겐 징집된 아들이 있네, 나는 내 아들이 어제 자살했다고 들었어.
부디 나를 들려보내고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겠네!
불쌍한 어머니, 평화와 모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오직 이 어미만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야..."
(“Con ơi, má có thằng con bị bắt đi quân dịch, nghe nói đâu nó chết hôm qua, cho má vào nhận xác nó đi con!
Tội nghiệp má quá, hòa bình rồi con ai cũng về nhà, riêng con má không về nữa...”)
라고 말하자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하는 유가족들과 휘하 장병의 모습을 본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고.
그렇게 사이공 병원에서 호찌민 병원이 된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1975년 5월 2일, 사이공 미토시에서 매장했다고 한다.
쩐반하이 준장의 시신을 수습한 휘하 장병 1명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재교육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참 얄궂게도 북베트남에도 남베트남 장성 쩐반하이와 성조가 완전히 똑같은 쩐반하이가 있다.
이 북베트남의 쩐반하이는 1966년 말부터 당시 남베트남 땅이었던 꼰뚬성에서 첩보병 역할을 하였다.
꼰뚬성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소년으로 위장한 북베트남의 쩐반하이는 꼰뚬성의 정보와 꼰뚬성의 상황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지만,
1967년 말에 남베트남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1968년 1월 22일에 남베트남 장교들에게 고문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문 도중 발각한 수류탄을 총으로 쐈고, 남베트남 장교 2명과 함께 폭사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북베트남의 쩐반하이는 인도차이나 전쟁 (1946.12.18~1954.8.1) 베트남 전쟁 (1955.11.1~1975.4.30) 에 참전했다고 하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건 그렇다쳐도 인도차이나 전쟁 참여는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본다.
인도차이나 전쟁 말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4~5세의 나이에 참전했다는 소리인데, 말이 되나?
아무래도 북베트남의 쩐반하이 가족이 참전한 걸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레응우옌비 준장
"우리들의 총을 내려놓고 그 총을 적에게 넘기라는 명령은, 솔직하게 말해서 총을 내려놓고 항복하라는 명령이다..."
(Lệnh bắt chúng ta buông súng bàn giao cho địch, nói thẳng ra là lệnh bắt chúng ta buông súng đầu hàng…)
"나는 전선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이 명령을 따를 수 없다.
내 생각에 장군이 된다는 것은 형제보다 국가의 명예와 은혜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Vì tôi là một Tướng chỉ huy mặt trận, tôi không thể thi hành lệnh này.
Tôi nghĩ thân làm Tướng là phần nào đã hưởng vinh dự và ân huệ của Quốc Gia hơn các anh em,
nên tôi phải chọn lấy con đường riêng của tôi”)
해외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nhatkyyeunuoc1/photos/a.638283602865057/4764472310246145/?type=3
참고함
북베트남 하노이 선떠이사의 명문 가문, 레응우옌씨 (gia tộc "Lê Nguyên")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하노이 선떠이사에서 살았지만, 1951년부터 트어티엔후에성 후에시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이 된다.
친일 친불 기회주의자 정치깡패조직 빈쑤옌의 수장, 레반비엔 (Lê Văn Viễn 1904~1972) 의 모습.
베트남 역사상 최악의 깡패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그 후로 남베트남군에 입대하였고, 1955년 남베트남의 친일 친불 기회주의자 정치깡패조직 빈쑤옌 (Bình Xuyên) 토벌 도중 부상당한다.
그 후로 계속 진급하였고, 1971년 제5보병사단 부사령관이자 나중에 설명할 레반흥의 부사령관이 된다.
(1971년 당시 레반흥의 계급은 대령이다)
1972년 4월 13일부터 1972년 6월 12일까지 진행된 안록 전투 (Trận An Lộc) 에 상관 레반흥과 함께 참전하였고, 안록 전투에 승리한다.
승전 이후 제3군단 사령관이 되었다가 대만을 방문한다.
1973년 6월 레반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21보병사단의 부사령관이 되었고, 1974년 11월 1일 최종 계급은 준장이 된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즈엉반민이 북베트남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21보병사단 휘하 병사들에게
총을 내려놓고 그 총을 적에게 넘기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총을 내려놓고 총을 적에게 넘기라는 명령은 항복하라는 명령과 다름없다는 말을 한 뒤, 자신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 후 레응우옌비는 남베트남 최고 사령부의 깃대 앞으로 경례를 한 뒤, 휘하 병사들에게 권총을 건네고 자신의 머리를 쏠 것을 명령,
그렇게 생애를 마감했다.
위의 서술은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의 페이스북을 따른 것으로,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후 제21보병사단 기지 앞에서 백기를 게양하고 부하들에게 해산을 명령한 후,
라이케 기지 (Lai Khê) 사령부에서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냥한 뒤 자살했다고 한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사용한 출처 링크에선
이후 라이케 기지에서 유서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유서에는
"많은 돈, 많은 재산, 너무 수치스럽다..."
( ""nhiều tiền, nhiều của, nhục nhã quá…”)
라며 미국의 후견자 역할을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적혀 있었다... 라고 북베트남 문서는 주장한다.
대놓고 폄하하는 의도가 드러난다.
반면 남베트남 출신 해외 이민자들에겐 미국에게 의존만 하는 군인이 아닌 자주적이고 유능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레응우옌비의 매장 장소는 매번 바뀌다가 1987년에 고향인 하노이 선떠이사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1952년 전직 베트남 중부 예산부 공무원에서 예산부장이 된 응우옌코아남의 모습.
1971년 불공을 드리는 응우옌코아남의 모습. 중간에 군복 입은 사람이 응우옌코아남이다.
응우옌코아남은 1953년부터 군인이 되었다. 말끔했던 과거 모습과는 달리 근심과 주름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세월을 고려해도 좀 안쓰럽다는 느낌이 든다.
응우옌코아남 소장
"우리들은 군인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이제 대통령은 전투를 중단하고 그 자리에서 인계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잘 있어라, 그리고 부대로 돌아가거라."
(“Chúng ta là quân nhân. Quân nhân phải thi hành lệnh thượng cấp.
Nay Tổng Thống ra lệnh ngưng chiến đấu, ở vị trí tại chỗ, chờ bàn giao.
Thôi chào anh em và anh em trở về đơn vị.”)
"나 스스로는 떠나는 걸 허락할 수 없다.
내 입장에선 언제든지 떠날 수 있지만, 최전선의 군인들, 그들의 처자식들, 그리고 나의 전우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떠날 수 없다.
(“Tôi không chủ trương ra đi.
Với cương vị của tôi, ra đi lúc nào cũng được, nhưng nghĩ đến anh em chiến sĩ ngoài mặt trận,
gia đình vợ con binh sĩ và đồng bào nên tôi không ra đi.”)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들은 치료받으려고 노력해라... 여기 있는 너희들이 할 수 있다면...
"( Em cố gắng điều trị… có qua ở đây…)
또는
"나는 너희들을 두고 떠나진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에 같이 남아 있거라."
("Qua không bỏ các em đâu. Qua ở lại với các em")
해외 남베트남 이민자들의 사이트
https://www.baoquocdan.org/2020/04/hoang-long-hai-chu-tam-cua-mot-ong-tuong.html

베트남 유명 가문, 응우옌코아씨 (Nguyễn Khoa) 가문의 일원인 아버지 응우옌코아뚝 (Nguyễn Khoa Túc)
베트남 최후의 왕조 응우옌 왕조 2대 황제 민망 황제 (Minh Mạng 明命 1791.5.25~1841.1.20 재위: 1820.2.14~1841.1.20) 의
11번째 아들 수리왕 응우옌푹미엔찐 (綏理王 阮福綿寊 Tuy Lý vương Nguyễn Phúc Miên Trinh 1810~1886) 의 후손인 어머니
꽁똔느목껀 (Công Tôn nữ Mộc Cẩ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업 성과가 좋아 1951년부터 베트남 중부 예산부 공무원이 되었고,1952년엔 베트남 중부 예산부장이 된다.
1953년 3월 말부터 징집명령으로 군인이 되었고, 1953년 4월부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3년 12월만에 중위로 졸업한다.
1954년 3월부터 공수부대에 임명되었고, 그 뒤로 진급의 길을 걷게 된다.
1964년 2월 남베트남 제4군단 사령관이 되었고, 그 뒤로 부사령관 레반흥과 같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섬멸하는 데 활약한다.
응우옌코아남 소장과 레반흥 준장의 활약 덕에 남베트남 멸망 직전인
1975년 봄까지도 제4군단은 남베트남 부대들 중에서 제일 피해를 적게 입은 부대가 되었다.
(참고로 1964년 2월 당시에 레반흥의 계급은 대위였고, 1972년 안록 전투 이후로 레반흥은 준장이 된다)
그리하여 1975년 봄부터 메콩강 삼각주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기습 타격을 한다는 "비밀 지역" ("mật khu") 계획을 세웠지만,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남베트남 대통령 즈엉반민의 항복으로 무산되고 만다.
1975년 4월 30일 저녁, 자신 휘하의 부사령관인 레반흥이 자살하였고, 1975년 4월 30일 휘하 장병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1975년 5월 1일 새벽, 22년의 고통스러운 군 생활을 스스로 마감하였다.
응우옌코아남의 유해는 처음엔 껀터시에 매장되었으나 1984년에 불교식 화장을 한 뒤,
사이공에서 호찌민시가 된 고법군 (quận Gò Vấp) 자람 사찰 (Chùa Già Lam) 에 유해를 보관하게 된다.
약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해당 사찰엔 응우옌코아남의 유해가 남아 있다고 한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 응우옌반티에우를 보면서 미소짓는 사람이 레반흥이다.
레반흥 준장
"나는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다.
장군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시도 지키지 못한다면
도시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Tôi bằng lòng chọn cái chết,
tướng mà không giữ được nước, không bảo vệ được thành,
thì phải chết theo thành.)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레반흥 항목에 나온 유언)
1933년 3월 27일 사이공에서 태어났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양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1954년 동원령을 징집하여 남베트남군에 입대하였고, 1954년 6월 16일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2월 1일에 소위로 졸업한다.
그 후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격퇴하여 군공을 세웠고, 최후에는 준장까지 진급한다.
그 중에서 레반흥의 제일 빛나는 군공은 1971년 6월부터 1972년 9월까지 맏은 제5보병사단 사단장에 있을 때였는데,
1972년 휘하 부사령관 레응우옌비와 함께 안록 전투에서 베트콩을 섬멸하는 군공을 세운다.
이 이후로 레반흥은 "안록영웅" ("Người hùng An Lộc") 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 된다.
1972년 3월, 레반흥은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제4군단 휘하의 참모가 된다.
1974년 11월 1일 제4군단의 부사령관이 되어 사령관 응우옌코아남과 함께 명성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1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대통령 즈엉반민이 북베트남에게 항복하자,
부하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같은 날 밤 자택에서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자살한다.
그의 시신은 껀터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레반흥은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안록을 지극히 아꼈는데, 그 증거를 보여주는 두 명언이 있다.
"나는 대통령의 명령을 아주 정확히 받았고, 안록을 지키지 못한다면 안록과 함께 죽을 것이다"
(Tôi đã nhận được lệnh của tổng thống rất rõ ràng, và nếu tôi không giữ được An Lộc, tôi sẽ chết theo An Lộc.)
"내가 있는 한, 안록도 있다"
("Ngày nào tôi còn, An Lộc còn.")
팜반푸 소장
1975년 4월 15일 자신 휘하의 장교, 쭝 대령 (Chung) 과의 대화에서
"쭝 대령, 자네는 나와 오랫동안 작전을 실행했어..."
(“Anh Chung, anh từng hành quân với tôi đã lâu…”)
"하지만 어젯밤, 티에우 대통령은 라디오에서 장병들이 겁쟁이라고 비난한 뒤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네.
자네는 쯔엉 중장에게 돌아가서 물어볼 수 있어, 전 회의에는 (쯔엉) 중장도 있었지,
나는 대통령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쁠래이꾸를 유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거절했고 나를 경질시켰지...
(쯔엉 중장은 아마 남베트남 중장인 응오꽝쯔엉 Ngô Quang Trưởng 1929~2007 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비엔 대장과 키엠 대장도 들렸는데 지금 대통령이 우리 탓을 하며 비난하고 있어,
이 부끄러움을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할지 정말 모르겠군, 전우들이 이해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끄러움을 끝낼 방법은 죽음뿐이야"
(비엔 대장은 남베트남 대장 까오반비엔 Cao Văn Viên 1921~2008
키엠 대장은 남베트남 대장 쩐티엔키엠 Trần Thiện Khiêm 1925~2021 일 가능성이 높다)
(“…mà đêm qua, Tổng Thống Thiệu lên đài nói chuyện và đổ tội cho các tướng lãnh là hèn nhát bỏ chạy.
Anh cứ về hỏi Trung Tướng Trưởng xem, trong buổi họp hôm trước, có cả Trung Tướng của anh nữa đấy, tôi đã xin Tổng Thống cho tôi giữ Pleiku bằng mọi giá, Tổng Thống không chịu, bắt tôi phải rút….
có cả Đại Tướng Viên và Cao Văn Viên nghe nữa mà bây giờ Tổng Thống nói chuyện với toàn dân đổ tội cho chúng tôi,
thật cái nhục này tôi không biết tỏ cùng ai, không biết đồng bào có hiểu không, chỉ có cách chết mới hết nhục”.
이후 온갖 독극물을 복용하고 자살하는 것이 실패하여 병원으로 이송된 이후, 1975년 4월 30일 의식을 되찾은 뒤,
아내인 도티럼데 (Đỗ Thị Lâm Đệ) 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은 어때?
(Tình hình đến đâu rồi?)
"즈엉반민이 군에 총을 내려놓고 항복하라고 명령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에 입성했어요!"
(Tướng Dương Văn Minh ra lệnh Quân đội bỏ súng đầu hàng, và Cộng sản đã vào tới Sài Gòn!)
아내의 말을 들은 팜반푸 소장은 그 말을 듣고
"잘 있어"
(ra đi)
라고 대답한 뒤 독극물 후유증으로 인해 바로 사망했다.
1928년 북베트남 하노이 하동군에서 태어났고, 군 복무 전엔 응우옌코아남과 비슷하게 하동군 공무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1952년 동원령을 실시하여 공무원에서 강제로 군인이 된다. 그것도 베트남이 아닌 프랑스의 군인으로.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있었다가 비엣민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수용소에서 복무하다가 제네바 협정으로 석방되어 남베트남으로 간다.
이후 남베트남에서 군 장교로 지내다가 1965년부터 제2보병사단장이 되다가 1974년부터 제2군단 사령관이 된다.
하지만 1975년 3월 4일부터 1975년 4월 3일까지 진행된 베트남 중부 지역 부온마투옷 (Buôn Ma Thuột)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
응우옌반티에우에게 경질당한다. 그 뒤로 자신의 부대를 철수하게 되지만, 이것도 도중에 베트콩의 개입으로 큰 손실을 겪는다.
결국 1975년 4월 15일, 자신의 휘하 대령인 쭝 대령과 하소연을 한 뒤, 독극물로 계속 자살 시도를 하다 실패,
1975년 4월 30일 겨우 의식을 되찾았지만 아내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독극물 후유증+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상황으로 인해,
스스로 눈을 감고 그대로 사망하게 된다.
ㅊㅊ
https://m.blog.naver.com/tonyart9988/222670653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