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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전투 찬가 베트남어 버전
https://youtu.be/3lwgaVpbaNM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에 대해 설명하기 전, 중국이 노리는 베트남의 섬들인 호앙사 군도와 쯔엉사 군도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 섬들은 1467년 후 레 왕조 때부터 베트남 측에서 존재를 알았고, 1467년부터 베트남 측이 서서히 다스리다가
응우옌 왕조 건국군주인 자롱 황제 응우옌푹아인 (Gia Long 嘉隆 Nguyễn Phúc Ánh 阮福映 1762.2.8~1820.2.3 재위: 1802~1820)
대부터 섬 전체를 관리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호앙사 군도 (Hoàng Sa) - 중립적인 명칭은 파라셀 군도지만 중국 측에서 우기는 명칭은 시사군도다.
1467년 이후 베트남 측에서 존재를 알게 되었고, 베트남이 서서히 섬 일부를 다스리기 시작하다가,
응우옌 왕조 때부터 섬 전체를 관리하였고, 응우옌 왕조 2대 황제인 민망제 때 제작한 지도인 대남일통전도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장제스 때부터 중국 땅이라 우기기 시작했고,
1974년엔 베트남 전쟁 도중 남베트남 섬이었던 호앙사 군도 대다수를 중국 즉 중공 측에서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는 엄연한 중국의 영해, 영토 침범이며, 이러한 침략은 북베트남 측에서도 규탄한 바가 있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그 당시엔 친중 정책을 펼쳤기에 중국의 이러한 침략을 묵인한 바가 있으나,
현재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 편을 들고 있는 중이다. 베트남 역시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중이고.
쯔엉사 군도 (Trường Sa) - 이번 게시물의 주인공. 중립적인 명칭은 스프래틀리 군도지만 중국 측에서 우기는 명칭은 난사군도다.
호앙사 군도처럼 후 레 왕조 때부터 베트남에서 이 섬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응우옌 왕조 자롱제 응우옌푹아인 때부터 본격적으로 관리하였고, 쯔엉사 군도처럼 대남일통전도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역시 중화민국 장제스 때부터 중국 땅이라 우기기 시작했고,
1987년엔 중국 역시 베트남의 쯔엉사 군도에 속하는 암초인 쯔텁 암초 (Đá Chữ Thập) 를 중국이 점령하였고,
1988년 중국이 베트남의 꼬린 암초 (đá Cô Lin) 랜다오 암초 (đá Len Đao) 각마 암초(đá Gạc Ma) 를 강탈할 목적으로 일으킨
쯔엉사 군도 해전으로 중국이 베트남의 영해와 영토를 침범하였으나, 각마 암초만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현재 베트남에선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을 잊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데 동조하고 있다.
때는 1988년 3월 초, 베트남이, 자국민 최소 150만 최대 350만을 학살한 친중 살인마 캄보디아 정권 크메르 루주를 멸망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란 괴뢰국을 세우면서 국제 사회로부터 지적을 받자, 베트남이 국제 사회랑 천천히 타협할 무렵,
중국은 중화민국 시절부터 베트남의 쯔엉사 군도에 해당하는 암초, 꼬린 암초, 랜다오 암초, 각마 암초를 강탈할 목적으로,
베트남 쯔엉사 군도를 그 시찰하는 해군 함선 수를 9개에서 12개로 늘리고 있었다.
전한 무제 시절부터 남월이 정복당한 이후로 중국에 대한 경계가 기본이었던 베트남은 이를 놓치지 않고,
꼬린 암초, 랜다오 암초, 각마 암초를 감시하는 해군 수를 늘렸다
1988년 3월 12일 랜다오 암초에 베트남 국기를 게양한 레레인선 (Lê Lệnh Sơn 1954~현재) 대위의 모습
1988년 3월 12일 새벽 5시, 베트남 해군 대위 레레인선은 랜다오 암초에 베트남 국기를 게양하였고,
1988년 3월 13일엔 부피쯔 (Vũ Phi Trừ 1957~1988.3.14) 대위, 부후이레 (Vũ Huy Lễ 1946~현재) 소령이
쩐득통 (Trần Đức Thông 1944~1988.3.14) 중령의 지위 하에 각각 각마 암초, 꼬린 암초에 베트남 국기를 게양하고
해군의 감시를 강화하고 해군 함대의 수를 늘렸다.
중국 해군은 이에 대해 각마 암초로 가서 베트남 해군을 도발하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나, 베트남 해군은 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1988년 밤 9시, 이를 본 베트남 해군 사령부는 각마 암초, 꼬린 암초를 지키는 해군 부대에 추가 함선을 보냈고, 소형 보트들도 파견했다.
그리고 중국 해군은 함선 2척을 각마 암초에 파견하였고,
그 다음 날, 전투는 시작되었다.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에 참전한 응우옌반라인 (Nguyễn Văn Lanh 1966~현재) 의 모습. 2015년에 찍은 사진이다.
해전 당시에는 하사였지만, 현재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88년 3월 14일 아침 6시, 중국은 베트남의 섬들을 강탈하고, 베트남 국기를 내리고 중국 국기를 게양하려 했다.
그리하여 소형 선박 3대와 40명의 병력이 쯔엉사 군도로 선공해왔지만,
쩐반프엉 (Trần Văn Phương 1965~1988.3.14) 소위, 응우옌반라인 하사가 이를 방어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 선박의 공격으로 쩐반프엉은 전사하였고, 응우옌반라인은 부상당한다.
1988년 3월 14일 오전 7시 30분, 베트남 선에서 미처 철수시키지 못한 중국 선박 2척이 함포를 발사하여 베트남군에 피해를 입혔고,
부피쯔 대위는 침착하게 베트남 함선에 있는 함포로 반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계속 치열해진 전투로 인하여 쩐득통 중령과 부피쯔 대위는 전사하였고, 각마 암초는 중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된다.
1988년 3월 14일 오전 6시부터 꼬린 암초로 중국군이 침공해왔지만, 부후이레 소령의 지휘로 중국군의 공격을 방어했고,
같은 날 오전 8시 15분경에 꼬린 암초를 수호하는 데 성공했으며, 지금도 꼬린 암초엔 베트남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전 8시 20분, 랜다오 암초 방향으로 중국 함선이 베트남 함선을 침몰시켰으나, 베트남군이 맹렬히 반격하여
랜다오 암초가 중국 암초가 되는 것은 간신히 막았다고 한다.
이 해전의 결과 각마 암초는 중국이 불법적으로 점령했고, 꼬린 암초, 랜다오 암초는 베트남이 간신히 지켜냈다.
이 당시 베트남은 소련과 동맹이었지만, 소련이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목적으로
소련군이 개입하지 않았기에 베트남 해군이 외롭게 지켰다고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현재 베트남에선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을 잊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데 동조하고 있다.
다만 베트남 공산당의 구시대적인 시각으로 인해 유엔 미얀마 군부 쿠테타 결의안에서 찬성한 것처럼
베트남 공산당은 반중이 패시브인 베트남 국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반중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동맹국으로 여기는 친러 성향은 여전하여, 유엔 러시아 인권 이사회 탈퇴 결정에 반대한 바가 있다.
속히 베트남이 몽골처럼 민주화하여 중국으로부터 빼앗긴 호앙사 군도 전체를 탈환하고, 쯔엉사 군도 전체를 탈환하기를 기대하며,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바다를 지키는 완벽한 수호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쩐득통 중령
"적에게 포위되어도, 선박을 잃어도, 우리들은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dù địch vây ép, dù mất tàu, chúng tôi quyết không lùi")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쩐득통 항목 참고함)
1944년 타이빈성에 태어나서 1962년 4월 7일에 포병으로 입대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베트남전 승전 이후로 해군이 되어 쯔엉사 군도를 지키기로 결정한다.
1988년 3월 14일 쯔엉사 군도 해전에서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휘하 해군들에게 적의 도발을 피해 침착하게 대응할 것을 명령하였다.
명령을 내린 뒤 침착하게 발포하였지만, 중국 해군의 발포로 전사하고 만다.
해당 명언은 쩐득통의 실질적인 유언이라 봐도 된다.
총사령관의 전사 이후로도 베트남 해군은 전의가 상실되는 일이 없이 꼬린 암초, 랜다오 암초를 지켜낸다.
안타깝께도 쩐득통 중령이 꼬린 암초와 같이 지키려고 했던 각마 암초 수호는 실패하였고, 현재까지 중국이 무단으로 점령하고 있다.
게다가 전사한 쩐득통 중령의 시신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71년에 응우옌티새오 ( Nguyễn Thị Seo ?~2005) 랑 결혼하여 딸 쩐티투하 (Trần Thị Thu Hà 1971~현재)
아들 쩐호아이남 ( Trần Hoài Nam 1975~현재)을 낳았으나, 군인의 임무에 충실하였기에 부부가 함께 있던 기간은 1년도 안 되었다고.
다만 군 복무 도중 자식들에게 편지를 많이 적었고, 가끔 있는 군 휴가에선 자식들에게 수많은 선물들을 해주었다고 딸 쩐티투하가 밝혔다.
현재 쩐득통의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군인으로 국방의 의무를 지키고 있다.
왼쪽은 쩐반프엉의 아내 마이티호아 (Mai Thị Hoa) 오른쪽은 쩐반프엉 소위
쩐반프엉 소위
" 섬을 적에게 넘길 바에야 내 목숨을 바치겠다. 그대의 피로 영웅적인 해군의 깃발을 선명하게 칠하라"
(Thà hy sinh chứ không chịu mất đảo. Hãy để cho máu của mình tô thắm lá cờ truyền thống của Quân chủng Hải quân anh hùng)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쩐반프엉 항목 참고함)
1965년 꽝빈성에서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호티득 (Hồ Thị Đức) 이 천주교 신자라 본인도 천주교를 믿었고, 베드로 (Phêrô) 라는 세례명이 있었다.
1984년부터 해군에 입대하였고, 1986년에 소위로 진급하였다.
1987년엔 아내 마이티호아 (Mai Thị Hoa) 랑 결혼하였고, 딸 쩐티마이투이 (Trần Thị Mai Thủy 1988~현재) 를 낳았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쩐반프엉 항목에 따르면 아버지 쩐반프엉이 전사할 당시
임신 3개월이 된 채로 딸 쩐티마이투이는 마이티호아 뱃 속에 있었다고 전한다.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에서는 부피쯔 대위의 지휘 아래 각마 암초에 베트남 국기를 꽂는 역할을 하였고,
부피쯔 대위와 함께 각마 암초를 중국 해선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부피쯔 대위와 함께 전사하고 만다.
꼬린 암초, 랜다오 암초는 다른 부대가 지켜냈지만, 각마 암초는 쩐반프엉 소위의 말에도 불구, 중국에게 강탈당한다.
쩐반프엉 소위의 시신은 1992년에 찾았다. 아내 마이티호아는
"아버지께서 우리 모녀에게 돌아왔단다" ("Ba đã về với mẹ con mình") 라는 반응을,
딸 쩐티마이투이는 "어머니! 각마 암초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돌아왔어요!" ("Mẹ ơi! Con đã nhìn thấy ba ở đảo Gạc Ma")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쩐티마이투이는 아버지를 따라 쯔엉사 군도를 지키는 해군이 되었고,
해군 중위 응우옌호하이 (Nguyễn Hồ Hải) 랑 결혼하여
딸 응우옌쩐나비 (Nguyễn Trần Navy 2011~현재) 아들 응우옌쩐쭉장 (Nguyễn Trần Trúc Giang 2015~현재) 의 어머니가 되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지금도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쯔엉사 군도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쩐반프엉은 천주교에 적대적인 베트남인들이
"천주교가 프랑스에게 나라 팔아먹고,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따가리짓 말고 한 게 뭐냐" 라고 비난할 때
베트남에 거주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도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다는 예시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고,
쩐반프엉의 외사촌 베드로 마리아 응우옌응옥피 (Phêrô Maria Nguyễn Ngọc Phi 1967~현재) 는
쩐반프엉을 소재로 "영웅 쩐반프엉에 대한 찬가" (Ngợi ca Anh hùng Trần Văn Phương) "베트남의 쯔엉사 군도" (Trường Sa-Việt Nam)
두 노래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쯔엉사 군도 해전에 참가한 레레인선 대위의 현재 모습. 네번째 사진에 나온 사람과 동일인물이다.레레인선 대위"내 인생의 가장 큰 소원은 쯔엉사 군도와 호앙사 군도로 돌아가,조국을 지키기 위해 이 바다에 있는 전우들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맞이하는 것이다!" (“Ước nguyện lớn nhất của đời tôi là được trở lại quần đảo Trường Sa và Hoàng Sa, thắp nén hương chào hương hồn đồng đội và tất cả những ai đang nằm lại vùng biển này cho chủ quyền Tổ quốc!")(베트남 뉴스 https://tuoitre.vn/buc-dien-toi-mat-cua-tu-lenh-giap-van-cuong-1279214.htm 참고함) 엄연한 베트남의 암초인 랜다오 암초에 국기를 게양했고, 랜다오 암초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베트남 해군.다만 랜다오 암초 수호에 성공했고, 무엇보다도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레레인선 대위 항목이 아예 없어서부실하게 적을 수 밖에 없음을 양해 바란다.다만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이라면 이 사람은 중국이 언제든지 베트남의 섬을 노린다면 그 때처럼 맞서 싸울 것이라 답변했다.
네번째 사진이 있는 문단에서 언급되었던 부후이레 소령의 현재 모습
부후이레 소령
"내 동지들의 피와 뼈는 아직도 이 깊은 바다 밑에서 묻혀 있어
다음 세대가 잠깐이라도 조상의 땅과 바다를 잊지 말 것을 상기시킨다"
(Máu xương đồng đội tôi đang còn nằm dưới đáy biển sâu ấy để nhắc nhớ thế hệ sau không một giây phút được lãng quên tấc đất, tấc biển của cha ông”)
꼬린 암초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해군 소령.
아쉽게도 이 사람도 레레인선 대위처럼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항목이 없어서 역시 자세히 적기 어렵다.
다만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 당시에도 지금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노안이라서
휘하 장병과 전우들에게 "아버지"(bố)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뉴스 기사가 있다.
어쨌거나 이 사람이 유능하고, 애국심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부피쯔 대위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 이곳은 베트남의 영토다"
("Hãy ra khỏi khu vực này. Đây là lãnh thổ Việt Nam")
"식사 후, 전선에 화력을 퍼붓자. 오늘 아침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저놈들이 우리들을 쏜다면 저놈들을 죽여야 한다"
(“Ăn xong thì đưa hỏa lực ra các vị trí chiến đấu. Sáng nay có thể đánh nhau đấy. Nó bắn mình thì mình phải diệt lại chúng nó”)
역시 이 사람도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항목이 없어서 적기 어려웠고, 베트남 뉴스 기사를 통해서만 적을 수 있다.
베트남 뉴스 기사들을 통해 막연하게 알 수 있는 사실들만 아는 대로 적어보겠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 태어났기에 학력은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영토와 영해를 지키기 위해 1975년부터 입대하였고, 부피쯔 대위는 고향의 자랑이 되었다.
군대 복무 도중 아내 응우옌티떤 (Nguyễn Thị Tần) 과 결혼하여 아들 부쑤언당 (Vũ Xuân Đăng) 부쑤언코아 (Vũ Xuân Khoa) 를 낳았다.
쩐득통 중령의 지시 하에 각마 암초에 베트남 국기를 게양했고, 중국 해군으로부터 각마 암초를 지키기 노력하였다.
하지만 부피쯔 대위와 전우들의 노력과 각오에도 불구하고, 각마 암초를 지키는 데 실패하였고, 부피쯔 대위는 전사하였다.
지금도 각마 암초는 중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
현재 부피쯔 대위의 아들 부쑤언당과 부쑤언코아는 군인이 되었고, 다낭 시에서 특별히 부쑤언당, 부쑤언코아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부피쯔 대위를 포함한 모든 베트남인들은 중국에게 빼앗긴 각마 암초를 절대 잊지 않고,
중국군이 공격한다면, 중국군을 죽일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
잡반끄엉 제독 휘하에서 복무하는 병사에게 말한 충고들 중 하나"나는 자네를 박대하고 싶지 않네. 그런데 이 불모의 암초들을 보존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가?이것은 나의 조국, 조국의 살과 피기 때문이지. 우리는 이 거친 암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지키는 것이라네!섬을 잃는 것은 바다를 잃는 것이지만, 바다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덮는다네.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들은 바다에서 왔다네.그래서 우리는 섬을 지키고 바다를 지켜야 하네. 아무리 힘들어도 지켜야 하고 죽어도 지켜야 하는 법일세!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을 견뎌야 하네."(“Tớ đâu có muốn đày đọa các cậu. Giá trị gì mấy cái hòn đá cằn cỗi này mà phải gìn giữ?Nhưng đây là Tổ quốc của mình, là máu thịt của mình. Có phải chúng ta giữ mấy hòn đá hoang dại này đâu mà là giữ biển đấy! Mất đảo là mất biển, mà biển lại bao bọc suốt từ Bắc đến Nam. Tất cả kẻ thù đánh ta đều đi từ đường biển vào. Thế nên chúng ta phải giữ đảo, giữ biển. Khổ mấy cũng phải giữ, có chết cũng phải giữ! Thế nên chúng mày mới phải chịu cảnh này”)(베트남 뉴스 링크 https://hoanhap.vn/chi-tiet/kho-may-cung-phai-giu-co-chet-cung-phai-giu1596592411.html 참고함) 박장성 룩남현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었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여 북베트남군에 입대한다.1942년엔 공산당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아내 응우옌티짯 ( Nguyễn Thị Chắt) 과 결혼한다.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말에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하였고, 이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1965년 특별당위원회 상무의원, 부사령관, 제44전선 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고, 1974년 소장으로 진급했다.1977년부터 1980년까지 응우옌바팟 ( Nguyễn Bá Phát 1921~1993) 뒤를 이어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해군 사령관의 자리에서 잠깐 물러난 이후로는 중장이 되었다. 1984년부터 199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1988년엔 베트남 해군 초대 제독이 되었다.해군 사령관으로 진급했을 당시엔 중국이 쯔엉사 군도를 노릴 것을 예견하였고,국가 경제와 베트남의 해상 및 섬 조건에 적합한 수상 함대 구축에 중점을 두고 해선 장교의 훈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한다. 베트남엔 긴 해안선과 많은 섬들이 있기에 해병대, 수상 특공대, 포병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잡반끄엉은이러한 부대들의 강화를 지시한다. 잡반끄엉이 강화한 해군들은 현대 베트남 해군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 이후로는 쯔엉사 군도에서 베트남이 지배하는 모든 섬들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지키려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력하고, 베트남 해군의 장비를 개선하는 데 힘쓰게 된다.현재 잡반끄엉은 현대 베트남 해군에서 존경받는 인물로,2004년부터 2015년까지 해군 제독이었던 응우옌반히엔 (1954~현재) 을 제외하면 베트남 해군의 유일한 제독이었다.잡반끄엉의 이름은 2009년 이후로 다낭시 리엔찌에우군의 거리 이름이 되었고, 카인호아성, 박장성, 꼰뚬성의 거리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이 사람은 1988년 베트남 쯔엉사 군도 해전 음모론을 반박한 사람들 중 한 명이지만, 아쉽게도 베트남어 위키백과에 항목이 없어,베트남 뉴스들로만 정보를 파악해야 하는 사람이다.1988년 베트남 쯔엉사 군도 해전에 참전한 사람으로, 각마 암초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이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마 암초를 중국에게 강탈당하자,베트남 육군 소장 레마르엉과 같은 억측을 싸지르는 사람들이 음모론을 설파하였고,이는 베트남을 혐오하는 중국과 베트남 내부 친중 국까들,그리고 베트남 공산당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으로 눈이 먼 해외 남베트남 극우파들이 쯔엉사 군도 해전 전체에 대한 음모론을 믿게 되었다. 이러한 음모론들은 레흐우타오와 같은 쯔엉사 군도 해전 참전자들 그리고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과 관련된마이쑤언빈 (Mai Xuân Vĩnh 1930.4.15~현재) 과 같은 해군 인사들이 반박하고 있다.이는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다.현재 그는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 관련 재향군인회에서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 참전용사들을 돕는 데 힘쓰고 있다.그리고 쯔엉사 군도 해전 참전용사들이 있는 지역에선 이러한 해전 참전용사들의 재활에도 크게 힘쓰고 있다.ㅊㅊ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tonyart9988&logNo=222702305509&referrerCode=0&searchKeyword=%EB%B2%A0%ED%8A%B8%EB%82%A8%201988
레흐우타오 (Lê Hữu Thảo) 1988년 베트남 쯔엉사 군도 해전 참전자
"나는 3월 14일의 순간들,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하고 확고하게 싸운 내 전우들의 모습들,
그리고 각마 암초에서 중국군이 일으킨 만행과 범죄를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
( "Chưa một phút giây nào tôi quên được những hình ảnh về ngày 14/3, về đồng đội của tôi, những người đã chiến đấu anh dũng, kiên cường đến phút cuối cùng; và âm mưu, tội ác của quân Trung Quốc đã gây ra ở Gạc Ma")
"그대들은 민족의 역사 속에 남아있지만, 그대들의 육신은 영원히 차디찬 바다 속에 있다"
("Các anh đã đi vào những trang sử vẻ vang của dân tộc, nhưng thể xác vẫn còn mãi nằm lại với lòng biển lạnh")
베트남 육군 소장 레마르엉 (Lê Mã Lương 1950~현재) 이 각마 암초 전투에서 당시 국무회의 부의장이자 외교부 장관인
응우옌꺼타익 (Nguyễn Cơ Thạch 1921~1998) 이 중국군이 각마 암초로 쳐들어오면 쏘지 마라고 말했다고 오해(오해인지 의도적 선동인지는 불명)하여, 1988년 쯔엉사 군도 해전 전체에 대한 음모론이 퍼지자 이에 대한 반박
(제일 중요한 문단이지만 네이버 베트남어 사전 직역했고, 구글 번역기 돌렸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음.
베트남어 잘 아시는 분이라면 조언 적극 부탁드림)
"나는 1988년 3월 14일 아침, AK-47 2정을 소지하고 기수대를 지휘하던 분대장으로, 각마 암초 근처에 있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진군, 통신이 매우 어려워서, 우리는 배에서 멀리 떨어져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은 없었다.
여기에, 계속 있다면 도발하지 않으니 선제공격을 하지 마라는 명령이 있었다.
적이 전우들에게 총을 쐈는데 포격을 허용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의 병사를 적의 표적으로 삼는 지휘관은 없다.
("Tôi là người trực tiếp có mặt tại đảo Gạc Ma vào sáng ngày 14/3/1988, là tiểu đội trưởng chỉ huy tổ bảo vệ cờ, có 2 khẩu AK 47.
Thực tế, lúc đó, phương tiện và thông tin liên lạc rất khó khăn, chúng tôi làm nhiệm vụ cách tàu một khoảng cách, nên không có mệnh lệnh nào là không được nổ súng cả.
Ở đây, nếu có thì chỉ là không nổ súng trước, bởi mình không bao giờ khiêu khích. Địch đã nổ súng vào đồng đội mình mà lại nói là không cho nổ súng thì không đúng.
Không có bất cứ ông chỉ huy nào lại để lính mình làm bia cho quân địch bắn cả")
"사격이 없었다면 왜 우리들이 여전히 중국군과 싸우겠는가.
그와 같은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이 그 전투 이후에 나 같은 군인이 몇 명이나 살아있는지 알고는 있는가?!"
( "Nếu không có chuyện nổ súng, thì sao sau đó chúng ta vẫn đánh trả quân Trung Quốc. Tôi không biết những người đưa ra thông tin đó có biết rằng, có tất cả bao nhiêu chiến sỹ như tôi còn sống sau trận đó không?!")
"이 허위 정보는 내 전우들과 가족들의 희생에 큰 상처를 주고 있다.
아직도 허위 정보를 게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길 바란다."
(Những thông tin này đang làm tổn thương tới sự hy sinh của đồng đội tôi cũng như gia đình các anh. Tôi mong rằng, những ai còn đưa thông tin này hãy suy nghĩ lạ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