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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왕 숙종 시기
경신대기근 못지않은 큰 피해를 남겼던
을병대기근이 닥쳤음
을해년(1695년)과 병자년(1696년)의 대기근이지만
여파는 1699년 기묘년까지 이어졌음
당시 전 세계가 소빙하기였기때문에
기근이 많이 일어나던 시기였음
1696년 을해년
도저히 이 기근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라고 판단한 부제학 이유가
청나라에 곡식을 청하자는 청곡을 제안함
하지만 이 논의는 지지부진 했는데
청나라에 쌀을 요청하자는 이야기는
몇번 논의 된 적 있지만
'오랑캐 쌀은 못먹는다'
'청나라의 은혜는 받지 않겠다'
'춘추대의에 어긋난다'
등등의 이유로 청나라에 쌀을 요청하지 못하고 있었음
숙종은 이번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결단을 내림
무조건 청나라에 쌀을 요구하기로 함
그래서 1697년 9월 청나라에 주청사로 다녀왔던
우의정 최석정에게 쌀을 사던지 무상으로 받던지
청나라에게 쌀을 달라는 사신을 보내라고 명령함
최명길의 손자이자 수학자로 많이 알려진 최석정은
명령을 받자마자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음
사신은 3개월을 달려 1698년 1월에 청나라에 도착했음
당시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사신에게 조선의 사정을 듣자마자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음 국경지대 시장에서
쌀을 구매해 갈수 있도록 조치를 취함
먼저 예산으로 청나라 시장에서 쌀 4만석을 구매하고
개인적으로 1만석을 구매하여 황제 하사미라는 명목으로
쌀을 조선에 원조하기로 함
이중에 3만석은 배로 운반하여 조선에 전달함
쌀 5만석은 1698년 4월까지 조선에 전부 도착하여
백성들과 사대부들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쌀을 받아갔다고 함
문제는 이게 맘에 안 들었던 강경파들이 있었음
조선인들은 갑자가 돌아오는 60년을 중요시 했는데
청나라에게 쌀을 요청한 해가 (1697년)
마침 병자호란으로 인해 항복했던 해의(1637년)
1주갑이었음
그러다보니 아직도 북벌이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라고 하던
유학자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남
청나라에서 온 쌀을 호미(오랑캐쌀)이라고 부르며
'오랑캐 쌀을 먹느니 의리 지키고 죽겠다'
라고하며 지방관리가 수령을 거부하거나
'이거 다 썩은 쌀이다. 썩은 쌀을 쓸데없이 은이랑 바꿨다'
'무상 1만석은 후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등등 온갖 이유를 대며 맹비난을 했음
심지어 역병의 원인이 청나라 쌀이다라고 하는 주장까지 나옴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한 책임자를 파직하라는
상소와 요구가 빗발침
결국 숙종은 1698년 8월 최석정을 우의정에서
해임 했음
(물론 나중에 영의정으로 복귀함)
하지만 강경유학자들이 아무리 난리를 쳤어도
청나라에서 보내온 쌀은 아무 문제없는 정상적인 쌀이었고
백성들은 '명나라는 할아버지, 청나라는 아버지'
라고 부르며 원조해준 청나라에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함
결국 강경 유학자들은 명나라의 은혜가 잊혀지게 생겼다라고
위기감을 느꼈음
사실 아무리 명나라와의 의리!라고 하며 북벌을 외치지만
강건성세 전성기의 청나라를 공격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거 잘 알고 있었기에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몸부림 치고 있었던 거임
결국 명나라 멸망 (1644년)
1주갑 (1704년)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말자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겠다
라는 명분으로 대보단을 쌓는 과정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