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장개석의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축출해 낸 모택동은 북경을 새로운 공산중국의 수도로 정했음.
그런데 단순히 도시의 개발도로만 생각한다면 이 선택은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음.
남경의 경우 중화민국의 색이 너무 진한 도시라 쳐도 당시 중국엔 아시아기준을 넘어 유럽 기준으로도 뛰어난 도시가 많았거든.
민국시절 상해의 발전은 정말 눈부셨다고 함. 도쿄조차도 상해의 부 앞에서는 한수 접어야했고 조계지를 중심으로 당시 미국과 유럽 유수의 도시에서나 유행하던 재즈가 성행하던 도시.
단순히 듣는것을 넘어 Shanghai swing이라는 독자적인 창작까지 이루어지던 도시였음.
제정러시아가 집중적으로 개발한 하얼빈
모택동도 국공내전 초기엔 하얼빈은 새로운 공산중국의 수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했음. 현실적으로 장개석의 중화민국에게 완승은 고사하고 회수를 기준으로 대륙을 반분이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시기, 소련의 지원을 받기 편하고 유사시 역돌격하기도 쉬우며 만주지방에서 아주 뛰어난 인프라를 가진 도시라는 점에서 합격점이었지
청나라의 시작을 알린 곳이자 일본제국의 입김이 들어갔던 심양(선양, 당시에는 봉천이란 이름으로도 불렸음).
이러한 도시들에 비하면 북경은 정말 디메리트가 많은 곳이었음.
북경은 19세기부터 남방의 해안가 도시나 만주에 비해 발전하지 못했고 20세기 초반엔 중국의 역사를 주도하는 역할을 상실했음.
열강들에게는 바다 근처에 있는 상해, 남경, 광주같은 도시가 있었고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자신의 영향권인 하얼빈과 봉천에 투자를 했지만 북경은 전조의 수도+은근히 내륙+교통편도 별로란 삼박자가 안좋은 의미로 시너지를 일으켰거든.
설상가상, 1928년 장개석의 북벌이 완수되자 영락제이후 유지해오던 수도의 지위, 그리고 이름조차도 빼았겼지
북방을 평정했다하여 북평(北平, 베이핑)으로 강제개명당했거든.
민국시절, 인구는 많지만 열강의 투자는 커녕 민국정부의 투자조차도 후순위로 밀린 북경은 쇠락하기 시작했음.
장개석시절 "남경 10년"이라 일컬어지는 발전은 직할지였던 장강이남에 집중되었지. 반대로 국민당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도 않던 북평은 인구만 많고 경제력과 도시 역량은 떨어지는, 농업위주의 쇠락한 대도시가 되고 말았음.
그런데 이러한 쇠락성이 오히려 공산중국의 신수도로서는 적합하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함.
모택동과 중공입장에선 부르주아와 서방의 나쁜물(?)이 제대로 들어있고 중화민국의 입김이 강하던 남경, 상해보다는 농민계층이 많은 북경이 새로운 수도론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