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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18일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 되면서
박정희-전두환-노태후로 이어진 군인정부를 끝내는 문민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YS는 군인정부를 끝낸 대통령답게 취임 하자마자 하나회 숙청을 바로 실행하기에 이른다
어 그래 맞아 맞아 형이야ㅋㅋㅋㅋ 하나회...맞아야겠지?
그러나 3당합당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YS는 하나회 숙청에 난관에 봉착하는 듯 싶었는데
바로 3당 중 민정당이 바로 하나회를 배후에 두는 정당이었던 것이다
설마 기껏 대통령 만들어 줬더니 찍어 내겠어? 그래도 우리가 하나회 아인교ㅋㅋ
??? : 합당 이전부터 이들과 더러운 동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다수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YS는 93년 3월 5일 육사 49기 졸업식 축사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이게 뭐야!!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르다더니 이거 배신 맞지??
(하나회)하..씨..이거 좆된거 같은데 어쩌지? 그래도 우릴 찍어낸다고? 하나회를?
그 당시 하나회는 군 내의 고위직, 요직은 전부 차지하고 있어서
이들을 찍어 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로 들어오면서 문민통제가 다시 강화 되고
하나회가 내부에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분열되어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볼수도 있었다
3일 뒤 3월 8일
국방부장관! 잠깐 나 좀 봅시다
(국방부장관 권영해)예 각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대뜸)군 장성들은 언제부터 바꿀 수 있습니까
예...예? 그...언제든지 가능은합니다 근데 왜 그러신지..?
오 그래요? 경질빔 삐융!
삐융2
그렇다
씹상남자 YS는 그 즉시 하나회 핵심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을 경질한 것이다
취임 한지 12일만에 단행한 인사였다
사나이 그 자체였던 YS는 정규인사 때까지 참을 수 없었는지 취임 후 2주도 안되서 하나회 숙청을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4월 2일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정체불명의 유인물이 발견 되었다(사진과 관계X)
이는 '육사 하나회 회원'이라는 제목의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총 142명의 하나회 회원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는 뉴스로 방영이 되었고 하나회의 존재가 전국에 알려진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문서를 살생부로 보기 시작, 하나회 처단의 여론이 들끓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하나회 대량 숙청의 명분을 위한 자작극이라고 보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게 맞다
하지만 분명한건 이는 추후 YS의 숙청 기조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4월 2일 하나회 문서 사건에도 YS의 숙청은 계속 되었고 그는 "이 땅에서 쿠데타의 망령을 영원히 지워버리겠다"라며
하나회 출신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 1군, 2군, 3군 사령관을 예편시키고 진급에서 배제시키는
씹상남자적 행보를 계속 했다
이후 5월24일, 12.12반란에 관련된 고위 장성들을 예편시켰는데 이는 하나회 회원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 소장급 일부가
날라가는 그야말로 하나회 내부에 있는 별이란 별은 다 떨어졌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YS는 원래 후보 시절 숙청을 기획 했던 초기에는 군장성 일부만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회 괴문서 사건과 숙청 과정 중 군 내부에서의 반발로 인해
그냥 다 날리기로 용단을 내리신 것이다
전격적인 YS의 하나회 숙청이 없었다면 아마 아직까지도 하나회 같은 군 내부의 사조직이 들끓어
군의 기강을 해이하게 하는 주범이 될 것이 뻔했을 것이다
YS의 거침없는 숙청, 참으로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p.s 각하께서는 하나회 뿐만 아니라 율곡이이 사업의 전방위적 수사를 지시하면서 수뇌부를 거의 날리는 수준의 거침 없는 행보로 군 내부의 비리도 때려 잡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