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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복궁 전체
경복궁의 시작은 390칸이었다. 궁성이 둘러지지 않은 상태였다가 차츰 확장해나가면서 궁성도 둘렀다.
지금의 경복궁은 흥선대원군 당시 재건한 것인데, 7225칸의 규모였다. 지금은 대부분 헐려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조선 전기 경복궁이 몇 칸까지 확장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7225칸보다는 적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광화문
광화문은 처음엔 지금의 창덕궁 돈화문처럼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궁성을 두르면서 지금과 비슷하게 변한 듯 한데, 당시에는 문이 다섯 개였다. 가운데 세 개의 문이 있고 좌우 끝에는 조금 작은 문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작은 문 위에는 누각이 따로 올라갔다.
다섯 개의 문은 황제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끝의 문에 따로 누각을 올리면서 다섯 개가 아닌 것처럼 구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창덕궁 돈화문도 잘 살펴보면 문이 다섯 개인데 양끝의 문은 막아서 세 개만 사용했다. 뭔가 눈 가리고 아웅처럼 느껴진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런 방식이 고려 황성에도 이용되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3. 근정전
지금의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의 근정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측면 1칸은 정전으로 쓰기엔 너무 비좁기 때문에 기둥 사이가 굉장히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근정전 지붕에는 청기와가 올라갔다. 현재 창덕궁 선정전(위 사진)에 올라가 있는 푸른색 기와다.
2층 구조의 석축 기단은 그대로지만 조선 전기에는 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그림과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그린 그림 양쪽 모두 난간이 그려져 있지 않다.
현재와 다르게 조선 전기 근정전 회랑의 좌우에는 2층 누각으로 만들어진 문이 존재했다.
4. 사정전
지금과 달리 청기와를 올렸다.
전후의 회랑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완전히 따로 분리되어 있다. 사정전부터 강녕전, 교태전까지 쭈욱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5. 경회루
단순한 4각 기둥이 아니라 화초와 용, 구름 등을 그린 기둥이었다.
지금과 달리 1층에도 지붕이 달려 있는 2층 건물이었거나 2층과 3층에 기와가 달린(혹은 모든 층에 기와가 달린) 3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그림에 기와 지붕 2단이 나타나 있고, 성종 대에 경회루를 수리할 때 3층 설계에 반대하는 의견이 기록에 보인다.
연산군이 창덕궁에 경회루를 본따서 서총대를 짓도록 했는데, 1천 명이 앉을 수 있고 높이가 30m에 이르렀다. 서총대를 경회루를 그대로 본딴 것이라 여긴다면 경회루는 지금보다 10미터 더 높은 건물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본땄다고 해서 완전히 그대로였으리란 법은 없으므로 그저 추정일 뿐이다.
위의 그림도 추정일 뿐이니 적당하게 보시면 된다. 1층부터 3층까지 전부 기와가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들도 보고 감탄했다면서 자뻑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6. 세종의 2층 건물 기록 - 강녕전 혹은 사정전
세종의 '왕자 시절'이라는 단어에 낚여서 이걸 세종이 경복궁 건물 2층에서 자다가 병에 걸렸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했었는데(태종 당시 동궁전은 경복궁에 없었기 때문), 다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옴.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宿疾]이 되었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나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 ’고 하였다. 나의 쇠함과 병이 전에 비하여 날마다 더욱 심하니 경은 그런 줄을 알라."
왕자 시절이 아니었음. 요새 나 왜 이렇게 이런저런 정보에 많이 낚이는 건지.
어쨌든 세종이 잠이 들었다는 건물은 아마도 강녕전이나 사정전이었을 것으로 여겨짐. 둘 중의 하나는 2층 건물이었다는 얘기.
한편,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경복궁에 대해 논의할 때 이문통이 옛 강녕전 터에 3층 누각을 세우기 적합하다라고 말했고, 선조가 알았다고 대답한 기록이 존재한다. 물론 논의만 되었지 경복궁 터는 275년 방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