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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드라마 및 사극에서
조선시대의 수군 (오늘날의 해군)에 대해 묘사할 때마다
이런 추레한 꼬라지가 사람들의 뒷목을 잡곤 하는데
그렇다고 반대로 병사들까지
이런 두정갑 하이바 풀착장을 할 여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물론, 이 복장이 그저 제작사의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만든
아예 개씹노근본 복장까지는 아니었는데
문종실록에서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복식에 대해 기술한 부분을 살펴보면
장복(章服) 또는 줄여서 장(章)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의 금(衿)과 같은 것으로,
각각 일정한 빛깔의 헝겊에 인수(認獸)를 그리고 부대의 이름을 써서 붙였다.
오위 중 전위는 한 변이 7촌(寸) 되는 삼각형의 붉은 헝겊에 주작(朱雀)을 그려 배 앞에,
후위는 원호(圓弧)의 두 끝 사이가 6촌 되는 곡면의 검은빛 헝겊에 거북을 그려 등에,
좌위는 길이 8촌, 너비 3촌의 장방형 남빛 헝겊에 용을 그려 왼쪽 어깨에,
우위는 사방 4촌의 흰 헝겊에 날개 돋친 범을 그려 오른쪽 어깨에,
중위는 지름이 15㎝ 되는 누런빛 둥근 헝겊에 날개 돋친 뱀을 그려 가슴 등에 붙였다.
문종실록 8권, 문종 1년(1451년) 6월 19일
그니까 일종의 당직사관 완장처럼 생긴 천을
관복이나 군복 위에 달아서 소속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장표에 대해서도 군기가 문란해짐에 따라
"십련들 존나 지 좆대로 다네" 하고 징계를 내렸다거나
재정비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하는 걸 보면 칼같이 지켜지지는 않은 듯 하다.
엥... 이거 완전...?
물론 조선 수군은 오위 소속의 중앙군이 아니라
각 지방에 소속된 지방군이어서 이런 복장을 달았을 거 같지는 않다.
(지방군은 고을의 현감, 만호 등의 행정직이 군무직을 겸임하여 통솔했으니)
하지만 저 좆같은 '水'자 천떼기가
어디서 왔는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임진왜란에서 대략 50년이 지난 무렵에 이런 기록이 나옴에 따라
'조선 수군은 갑옷이 아예 없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지만
謂感矣, 且頃因統制使狀啓, 戰船軍卒, 皆令着甲,
今又申明, 使之造作而一船, 例載九十人則當造鐵甲九十領
또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밝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비변사등록, 인조 27년(1649) 3월 19일)
3월 초6일 (병인) 맑다. [양력 4월 17일]
아침밥을 먹고난 뒤 출근하여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갑옷․ 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진 것이 많아
색리․궁장․감고 등을 문책했다.
(난중일기, 선조 25년(1592) 3월 6일)
등의 기록을 보았을 때
임진왜란 직전, 왜란기, 그 이후에도 수군이 갑옷을 착용하였으며
'수군도 갑옷 입어야제' 가
적어도 당대의 상식으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또 "모든 수군이 칼같이 갑옷을 풀착장했을까?" 는 좀 의문인 게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충무공 이순신의 최후인 노량해전에 대해서 다룬 당대의 그림을 보면
수군의 대부분이 갑옷을 갖추고 있지 않다.
물론 이 시기의 그림에서 고증을 따지는 것도 무리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군도 낭낭하게 두정갑 풀착장해야지!" 역시 상식은 아니었음을
엿볼 수는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판옥선 밑에서 노를 젓는 격꾼,
천·지·현 자총통을 장전·조준·발사 하는 화포수처럼
개빡세게 육체노동을 하는 승조원들은
머리에는 천으로 된 조건이나 전립
옷으로는 납의 또는 그냥 통일된 형태의 천옷
여기서 '납의'란 기본적으로 납의는 중들이 입는 승복을 말하는데,
이것저것 천과 솜을 두텁게 누벼서 퉁실해 보이는 누비옷의 형태를 말한다.
서양에서 플레이트 갑옷이 어쩌고 하던 시기에도
안에 '갬비슨' 이라고 하는 깔깔이를 입어
피부와 쇠가 직접적으로 닿는 것을 방지하고
최소한의 방호력을 챙겼던 것과 유사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음.
외부갑판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요원들,
특히나 등선백병전이 발생할 경우 직접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요원들은
머리에는 전립 또는 하이바 느낌으로 엄심주
몸통에는 납의 + 엄심갑
이 엄심갑은 한지를 소금물에 담가 경화시킨 종이갑옷이었는데
뭔가 이게 생각나기도 한다.
또한 활동성이 더 좋은 찰갑 형태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摺紙爲札, 以鹿皮編成, 黑漆曰紙甲。
종이를 접어서 미늘을 만들고, 녹비로써 엮어 만들어, 검은 칠을 한 것은 ‘지갑(紙甲)’이라 한다.
(세종실록 133권, 오례 군례 서례 병기 갑옷·투구)
"以紙漬鹽水曝乾, 與布絲交雜縫合, 又以黑緜布(裏)〔裹〕 外,
白布爲內, 間以紙繩穿結若頭釘然, 矢不易入, 射弓亦便, 兼可禦敵, 而所造之功, 不如造甲之難。"
‘종이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말리어 가지고 베와 실로 섞어 꿰매며,
또 검은 무명으로 밖을 싸고 흰 베로 안을 받치는데
사이사이에 종이 노끈을 뚫어 맺기를 못대가리같이 하므로 화살이 잘 들어오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편리하며 겸하여 적을 막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공력도 갑옷 만드는 것처럼 어렵지 않다.’
(연산군일기 35권, 연산 5년(1499년) 10월 23일)
동래성에서 발굴된 임진왜란기 조선군의 찰갑
그리고 비교적 칼과 창을 휘두룰 일이 적고
배와 전투를 지휘할 상급 수군들은
육군의 고위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두정갑 형태의 갑옷을 입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