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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기원전 41년.
검투사 장군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애비가 넷인 로마가 낳은 최악의 싸패, 옥타비아누스를 축출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단을 포함한 로마군을 해산하고 이들에게 토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어디서 땅이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군단병들에게 토지를 안 주면 권력도 바이바이인 상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선택은 애비가 넷인 싸패답게 시민들의 땅을 뺏어서 군단병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수도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평판은 클로아카 막시마(로마의 하수도)에 쑤셔박혔기에
얼마 전까지 그와 함께 군단병 토지를 마련해주는 위원회의 일원이었지만 입 싹 닫고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했다.
그는 먼저 형수인 풀비아에게 옥타비아누스를 치자고 꼬셨는데
풀비아는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척지면 곤란하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루키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몰아내고 로마를 남편에게 바치면 클레오파트라랑 바람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돌려올 수 있다며 충동질하자 이에 동의했다.
이렇게 기반을 다진 그는 스스로 옥타비아누스의 폭정으로부터 시민들을 수호하는 수호자를 자처하며 인기를 모았다.
왜 풀비아의 지지가 중요했냐 하면 풀비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후손이자 호민관 클로디우스의 전 아내였기에 민중들의 아이돌이기 때문.
한편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풀비아의 딸과 이혼하자 두 사람은 무력 행사를 하기로 했고, 그게 바로 페루지아 내전 되겠다.
그런데 일부 군단병들은 이 싸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죄다 카이사르파인 군단병들 입장에서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정쟁은 카이사르의 양자와 카이사르의 심복 사이의 갈드컵에 불과했고
옥타비아누스가 토지를 마련해주기 시작한 이상 굳이 싸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
그래서 일부 군단은 대표단을 보내 두 사람을 중재하겠으니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동의했으나 루키우스는 이 대표단의 제안을 일축하며 "칼리가를 신은 원로원 의원 나으리 납시셨네"라며 이들을 조롱했다.
이에 빡친 2개 군단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가담하는 것으로 루키우스에게 화답했다.
그로부터 1년 후, 페루시아에서 포위당한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기아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