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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식민지는 리비아와 동아프리카로 구분되는데 리비아는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근접하다는 이점이라도 있었지, 동아프리카는 도통 이민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적도 근처에 있어서 끔찍하게 덥고, 천연자원은 부족하고, 심지어 농사까지 안 되는 불모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독특한 발상으로 동아프리카 이민을 장려했는데 다름아닌 동아프리카 여성들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이탈리아의 사진 작가들은 동아프리카 여성들의 관능적인 포즈의 누드 사진을 촬영함으로써 동아프리카 여성들이 벌거벗고, 음탕하고,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고정 관념을 강화했다.
"내 친구한테 기념품을 보내고 싶어요."
인종분리 정책이 강화된 무솔리니 시대에도 이런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계속 되었지만, 우습게도 흑인과 결혼하는 건 최대 징역 5년형의 범죄였다.
벌거벗은 흑인 여성을 보고 '처녀지' 드립을 치는 이탈리아인. ('처녀지'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 한 주요 목적이었다.)
지금 보면 병신 같지만, 이런 선전은 동아프리카로 이민 갈 잠재력이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이 낮은 젊은 청년 남성들에게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 동아프리카로 가면 '검은 비너스'들과 자유분방하게 관계할 수 있다는 정복욕과 함께 많은 이탈리아 청년들이 동아프리카로 향했다.
인종 정책이 강화된 이후, 인종 간 성관계로 인한 이탈리아인의 혈통 오염이 문제가 되었고, 백인으로만 구성된 매춘 업소 설립도 여러 차례 검토됐지만, 지역의 성비가 너무 박살나 있어서 결국 이탈리아인들의 성욕 해결은 지속적으로 흑인 매춘부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 결과는 미성년자 성매매, 흑인 첩, 무분별한 매춘으로 인한 이탈리아군의 비전투 손실 및 민간인들의 성병 감염, 버려지는 혼혈 사생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