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저우언라이
긍정적 평가로는
- 뒤에서 묵묵히 마오의 실책을 바로 잡고
- 국민과 역사를 생각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인민의 총리'
문혁 이후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며 저우를 지지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헨리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에 대해 강렬했던 인물이라며 높이 평가
부정적 평가로는
- 교활하고 아첨과 처세에 능하고 총리로서 바른 말을 하지 않았던 예스맨
-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었던 기회주의자
심지어
문혁 시절 동료로부터 "총리는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이 미친 짓을 보고 있을거냐"는 비판을 샀고,
문혁 이후 덩샤오핑 역시 저우를 긍정하면서도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문혁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
저우언라이가 마오의 뒷수습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저우언라이 때문에 마오의 독재적 통치가 더 공고화되었다는 평가도 존재
결국 마오의 모든 동료들은 신하 같은 신세가 되었고 그에 걸맞게 처신했다.
이러한 처세에 가장 능한 자는 저우언라이였다. […] 하지만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오는 의심이 너무나 많아져서 끊임없이 측근의 충성을 확인해야 안심했다. 저우언라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석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배신했기 때문이다.
- 필립 쇼트, 양현수 옮김, 『마오쩌둥 2: 문화혁명의 붉은 황제 1937~1976』 (서울: 교양인, 2019), p426.
나는 저우언라이가 마오의 충실한,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아첨하는 노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마오에게 총애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마오에게 충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 리즈수이, 손풍삼 옮김, 『毛澤東의 私生活』 (제2권, 서울: 고려원, 1995), p.87.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철저한 충성을 요구했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저우언라이가 실각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그렇게 비굴할 정도로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마오는 그를 업신여기면서도 믿었다.
- 리즈수이, 손풍삼 옮김, 『毛澤東의 私生活』 (제3권, 서울: 고려원, 1995), p.139.
역사에 대한 가정의 말이지만, 저우언라이가 만약 단호하게 마오쩌둥의 문혁 발동에 반대하였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 마오쩌둥파는 린바오뿐이었고, […] 문혁 개시를 결정할때 마오쩌등은 저우언라이, 주더를 끌어안음으로써 겨우 4대 3의 다수파가 되었다. 만약 저우언라이가 문혁의 결과를 예상하고 마오쩌둥의 문혁에 반대하였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 야부키 스스무, 손승회 옮김, 『문화대혁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7), p.165.
저우는 ‘황제’를 보필하는 ‘재상’으로서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마오의 생각을 추종하고 충실히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저우의 순종은 마오의 잘못된 생각이 계속 발전하게 만드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 조영남, 『중국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전자책, 서울: 민음사, 2020), 제2장.
열쇠는 저우언라이였다. 그가 군부의 대의를 지지한다면 힘의 균형이 군부 쪽으로 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총리는 주석의 심기를 절대로 거스르지 않기로 다짐함으로써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 프랑크 디쾨터, 고기탁 옮김, 『문화 대혁명』 (제3권, 파주: 열린책들, 2017) pp.231-232.
흥미로운 건 중국 현대사 특히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프랑크 디쾨터와 필립 쇼트가 모두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 마오쩌둥 시절 중국 최고 지도부의 변화
저우언라이 고평가에 대해서는 그가 원래부터 이미지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1세대 지도부에서 마오쩌둥을 제외하면 실각, 숙청, 강등을 겪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문혁 이후 마오를 어느 정도 낮추면서 그걸 만회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활용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꽤 그럴 듯하다고 보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