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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의 그린뱅크에 90m 망원경이 지어졌다.
안테나 접시 지름이 90m에 달해서 90m이다.
미국은 피트 단위를 쓰기 때문에 300피트 망원경이라고 불렀다.
영국이 자랑하는 조드럴 뱅크의 250피트 망원경보다도 컸다.
후발주자였던 미국이 2차대전 종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전파천문학의 중심지였던 영연방으로부터 패권을 완전히 가져가는 시점이었다.
거함거포주의를 연상시키지만, 떠다니는 쓰레기가 된 전함과 다르게 망원경은 일변도로 크면 클수록 좋았다.
망원경의 성능은 먼 것을 얼마나 더 멀리, 더 자세히, 더 밝게 볼 수 있는 지로 결정되는데,
이 모든 것이 망원경의 구경, 즉 크기와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는 600피트로 계획되었지만 예산 문제로 축소 설계된 300피트 망원경의 성능은 그래도 천문학자들의 기대를 만족시켰다.
우리 은하의 성간 물질을 지도화하면서 우리 은하의 모양을 아는 데 도움을 주었고,
초신성 잔해 속에 펄서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펄서가 초신성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부 은하들의 회전 속도를 살펴보면서 암흑물질의 존재를 시사하기도 했다.
그동안 뉴멕시코의 VLA, 푸에르토리코의 아레시보, 독일의 에펠스베르크 같은 기술적으로 우월하고 훨씬 거대한 신예기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300피트는 그린뱅크를 상징하는 성능 좋은 전파망원경으로 애정을 받았다.
무너지기 전까지는.
1988년 11월 15일의 저녁이었다.
당일 300피트의 운전을 맡은 그렉 몽크(Greg Monk)는 아버지를 따라 그린뱅크 사이트에 취업한 오퍼레이터였다.
본래 그의 근무는 이날 저녁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이었지만, 교대자의 개인 사정 때문에 대신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가 망원경 동에 온 해질녘부터 설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뭘 점검하려고 망원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그린뱅크 사이트의 소장이 개인 연구에 잡힌 관측 일정 때문에 방문하는 등 분주했다.
소장이 다른 사이트에 전화를 걸면서 시끄러웠던 조작실은 밤이 되자 그가 망원경 동을 나서면서 잠잠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그렉은 망원경 접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건물의 부엌으로 가서 야식을 챙겼다.
부엌에서 조작실로 가는 동안 복도의 창 너머로 비치는 망원경은 벌써 한 사이클을 마치고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렉이 조작실로 돌아왔다.
조작실 상단에 걸린 벽걸이 시계는 오후 9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일어났다.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머리 위로 제트기가 날아가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이윽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체불명의 물체가 건물 천장을 뚫고 들어왔고, 복도에는 그것을 따라 들어온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건물이 흔들리면서 벽걸이 시계도 제자리를 이탈했고, 조작실의 천장 타일이 하나 둘 씩 떨어졌다.
터진 벨트처럼 천장이 주저앉자 먼지와 죽은 파리, 잔해물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형광등 커버도 한 개 내지 두 개 떨어졌다. 비상구 조명을 빼면 모든 불이 꺼졌다.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이 모든 게 그렉의 눈앞에서 2초 내지 3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겁에 질린 그렉은 수화기를 들었고, 수백 미터 떨어진 140피트 망원경 동의 조작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잘못된 번호로 발신했기 때문이었지만, 경황이 없는 그는 전화가 먹통인 줄 알았다.
수화기를 내려둔 그렉은 서둘러 눈앞의 조작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망원경의 디지털 고도계가 +74.3도를 띄우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렉은 서둘러 동을 벗어났다.
정문을 열고 건물을 탈출한 그렉은 건물 옆 주차장으로 몸을 옮겼고,
그는 탄식했다.
잠긴 차 문을 열 열쇠가 없다. 깜빡하고 조작실에 두고 온 것이다.
건물은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고, 군데군데 창문 깨지는 소리도 계속해서 났다.
또 들어가면 천장에 깔려서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옆 망원경 동까지 거리가 수백 미터였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려면 차가 필요했다.
그렉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건물로 뛰어 들어가서 열쇠를 찾았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그는 뒷유리가 깨진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도로 한 쪽에 구조물이 주저앉은 것을 보았다.
그는 처음 망원경의 일부가 부서진 것으로 생각했다.
140피트 구역에 도착한 그렉은 고등학교 시절 과학 선생님이었던 140피트의 오퍼레이터 해럴드 크리스트(Harold Crist)를 찾아갔다.
차에서 내리고 정신없이 달려갔던 탓에 140피트 동의 닫힌 문에 얼굴을 부딪히면서 코피가 흘렀다.
그가 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자, 해럴드와 140피트 주임 조지 립탁(George Liptak)이 보였다.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그렉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윽고 해럴드가 입을 열었다.
"그렉, 무슨 일이야?"
140피트 망원경의 주임인 조지 립탁은 그날 저녁 140피트의 시간 기록 장치가 고장 났다는 해럴드의 연락을 받고 사이트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한 후 로비에서 설비 트러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300피트의 오퍼레이터인 그렉이 정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몰골은 아주 이상했다.
코피를 흘리고 있었고, 어깻죽지에는 웬 유리 조각들이 천장의 조명을 받고 반짝이고 있었다.
눈은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얼이 빠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웃긴 몰골을 보고서 조지가 웃음을 참고 있던 사이, 옆의 해럴드가 물었다.
"그렉, 무슨 일이야?"
"300피트가 무너졌어요."
그렉은 300피트가 무너졌다는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조지와 해럴드는 고개를 돌리고 마주 보며 생각을 나누었다.
'이놈, 술에 취한 거 같은데?'
"그렉, 술을 좀 많이 마신 거 아니야?"
해럴드는 그렉이 동네 주점에서 한잔 걸치다가 시비가 붙어서 두들겨 맞은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렉은 연신 300피트가 무너졌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조지는 지금이 그렉의 근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그가 대근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놈이 한잔하고 장난치러 왔구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를 보고 미심쩍은 조지가 말했다.
"좋아, 내가 가서 확인해 보지. 같이 가보자."
해럴드는 140피트의 운전으로 자리를 뜰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확인하기로 하였다.
그렉과 함께 동을 나선 조지의 눈에 그렉의 차가 들어왔다.
그렉의 차는 뒷유리가 깨진 채로 유릿조각이 실내 구석구석 흩어져 있었는데,
뒷좌석에는 300피트와 똑같은 색깔로 도색된 커다란 볼트가 놓여 있었다.
그제야 조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지는 그렉을 자가용 트럭에 태우고 300피트로 향했다.
길을 가는 동안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이 앞을 비추고 있었다.
본래라면 저 멀리 300피트 동에서 보여야 할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00피트에 가까워질 무렵, 조지는 전조등에 비친 망원경의 모습을 보았다.
주차장에는 온갖 볼트와 너트 따위의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무너진 망원경의 모습을 본 그는 처음에 접시가 가동 한계를 넘어서 땅을 향하고 있는 줄 알았다.
"저게 저렇게도 휘어질 수 있는 거예요?"
망원경을 지지하던 커다란 철골은 캐러멜처럼 휘어져서 나중에 온 직영 천문학자를 놀라게끔 했다.
조지와 그렉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그린뱅크 사이트와 상위 기관인 미국국립전파천문대(NRAO)의 관계자들은 시설의 상태를 보고서는 망연자실했다.
하필 그날 밤에 비가 예보되어 있었는데, 뚫린 천장의 틈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서 조작실의 귀중한 장비와 기록 장치가 전부 손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동이 틀 때까지 장치의 방수 처리에 힘을 썼다.
천만다행으로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무너진 300피트의 자리는 한동안 NRAO 천문학자와 그린뱅크 사이트의 소장과 오퍼레이터와 정비 인원의 눈물로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UFO의 외계인이 자기를 엿보는 망원경을 부수다"
"미국의 가장 성능 좋은 전파망원경이 적대적인 외계인에게 공격 받다!"
날이 지나면서 300피트 망원경이 하룻밤 사이 폭삭 주저앉은 이유로 해괴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지구인들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화가 난 외계인이 본보기로 전파망원경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NRAO는 망원경이 무너진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수개월 동안 현장과 망원경이 남긴 마지막 데이터들을 조사하였고,
구조 안전성을 검토하는 데 유한요소해석법처럼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300피트 망원경은 자중에 의해 무너진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원인은 천문대의 무리한 운용이나 유지보수 방식이 아니라 설계 결함인데,
처음 설계 당시 망원경의 구조 안정성을 검토할 때 고려하기 어려웠던 부가적인 힘들이 많았다.
이 힘 때문에 트러스를 접합하는 거싯 플레이트에 가해지는 전단하중이 허용 하중을 초과하는 경우까지 나타났고,
그 결과 전단이 발생하면서 망원경이 붕괴했다는 것이다.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거싯 플레이트.
붕괴의 조짐은 최소한 몇 주 전부터 있었는데,
300피트의 설비 주임을 포함한 오퍼레이터들은 망원경으로부터 쇠 긁는 듯한 이상한 소음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망원경 총괄책임자와 정비사를 불렀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사후 분석에 의하면 데이터 기록 장치에서는 뚜렷한 변화가 일었는데,
거싯 플레이트가 갈라지고 접시의 형상이 변화하면서 안테나의 빔 폭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애당초 300피트 망원경은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600피트 등 중요한 사업이 무산되면서 당장의 연구를 착수할 수 있어야 할 사양의 염가형 장비였고,
건설 기간도 2년 남짓으로 급조에 가까운 임시 시설 개념으로 운용할 것이었다. 원래 수명은 5년에 불과했다.
보강이 빈약해서 무게도 대단히 가벼웠다.
구경이 작은 조드럴 뱅크의 250피트가 약 3000톤에 달하는 반면, 300피트는 600톤밖에 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동절기에 눈이 와서 안테나에 쌓이면 메쉬가 휘어버릴 정도였다.
NRAO는 이 임시 설비를 위해서 한동안 제트 엔진 송풍기까지 운용했다.
하지만 60~70년대 전파천문학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과학적으로 아주 강력한 성능의 하드웨어를 갖췄던 300피트 망원경은
싼값에 작은 전자장비만 개수하면 훨씬 더 강력한 전파망원경이 되었기 때문에 임시 시설로서의 의미는 없어졌다.
관계자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300피트 망원경이 수명의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를 대체할 신형 거대 망원경을 제안하고 있었지만,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은 안테나 여러 개를 배열한 VLA의 과학적 성과가 에펠스베르크를 비롯한 거대 망원경들의 성과를 찍어 누르면서
단일 접시의 거대 망원경이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거대 망원경이 에펠스베르크를 압도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러한 제안이 막 나올 무렵에 300피트가 무너졌다.
전파천문학을 선도하는 귀중한 장비를 잃은 NRAO는 완전히 죽어버린 300피트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오래 쓸 수 있게 튼튼하게,
남북만 가능한 300피트와 달리 어디든 지향이 가능하게,
기왕이면 에펠스베르크보다는 크게.
약 10년에 걸쳐서 계획을 검토하고 실행하면서 신형 망원경이 착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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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00년, 무게 8000톤에 지름 110m×100m의 세계 최대의 조향식 안테나인 그린뱅크 망원경(GBT)이 탄생했다.
GBT는 300피트의 과업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달과 행성, 소행성을 관측할 수 있는 레이더 기능도 갖추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