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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_of_Bannockburn_-_Bruce_addresses_troops.jpg

 

 

1. 중세의 정치는 토지에 달렸고, 또한 토지를 통해 먹여살리는 군사에 달렸으며, 군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쟁 행위의 승패에 달려 있었다. 

 

 전쟁 이외의 나머지 분야에는 통치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선 행위와 빈민 구제는 교회에 달려 있었고, 교육은 가정 교사나 대학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통치자의 정부는 오로지, 적들을 살육하고 무릎 꿇리는 데에 존재 의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백성들을 보살피는 의무가 있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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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3세기 이전 대다수의 중세 유럽 지역에서 농민들은 예속된 존재, 즉 농노였다.

 

 농노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무장 영주나 교회 당국에 소작을 부쳐먹고 살았다. 

 

 한 영지(피스크, fisc)는 하나의 대리인(관리인, Vilicus, Mayor)이 관리할 수 있는 크기로 다른 영지와 나뉘어있다. 

 

 이 영지는 다시 영주 개인의 땅과 소작인(Colonus)들의 땅으로 나뉘었다. 이 땅들은 여러 개의 맨스(Manse)라는 구획으로 나뉘었는데, 영주 땅에 있는 중앙 맨스에는 석조저택이 자리하고 있지만 소작인들의 맨스에는 나무로 만든 조잡한 집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가혹한 지대 징수에 저항하는 농노들은 무장한 귀족들에게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기에, 굶어죽지 않을정도로만 자신들의 몫을 가져갈 수 있을 따름이었다. 

 

 

Breaking_Wheel.jpg
 

 

 만일 저항한다면, 농노들의 집은 불타고, 사지는 절단되었다. 성직자들은 고상한 취향을 지닌 귀족들의 고문 행위를 비난했지만, 반항하는 농노들을 적절하게 구타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것의 필요성에 있어서는 뜻을 함께했다.

 

 영지 내의 농노들은 정해진 양만큼 영주의 맨스에 가서 토지를 일구어야했고, 이외에도 관리인이 시키는 여러가지 잡다한 육체노동을 도맡아서 했다. 

 

 또한 영지 내의 여러 부속시설이나 땔감 등을 사용하는 대가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 땔감을 주울 때는 영주에게도 장작의 일부를, 숲에 돼지를 풀어놓고 풀과 도토리를 먹이는 대가로는 와인을, 들판에 양을 풀어놓고 싶다면 몇년 마다 양 한마리씩을 갖다 바치는 식이었다. 

 

 이외에도 매해 세금을 내야했는데 은전 몇 푼, 닭 몇 마리와 달걀, 그리고 가공된 판자, 황소, 꿀과 왁스, 기름, 직물 등으로 지불 할 수 있었다.

 

 물론, 동시대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서유럽에서의 자영농 비율은 건식 농업의 특성상 유의미하게 높았다. 

 

 그들은 본래 예속된 신세의 농노와는 상당히 복잡하고도 엄격한 구분과 서열, 그리고 갖가지 중첩된 계약관계들에 의해 철저히 구별되는 자유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며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양자의 구별은 상대적으로 덜 엄격해지기도 했다. 지주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자유민을 자신들의 농노로 예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때때로 성공했다. 

 

 따라서 장기적인 틀에서 보자면, 농민들은 모두 매한가지의 신세였다. 그들을 지켜주는 국가란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인들은 언제나 그들을 착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Salic_Law.png

 

 

3. 중세의 정치와 법률은 명예의 원리를 통해 돌아갔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몰래 속이는 도둑질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보다 더 악랄하다고 여겨졌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 의해 절도범으로 비난받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기분나쁜 모욕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한 인간의 법적인 평판이 완전히 난도질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은 다시는 법정에서 증언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에 의해 사기를 당하거나 폭력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을 것이다.

 

 제국 시절에 비해 법은 상당히 솔직해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원시적이 되었다.

 

 중세 초, 복잡한 사업상의 규정이나 까다로운 재판 절차에 대한 법령들은 말 그대로 버려졌다. (원격지 무역의 쇠퇴와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세 초의 프랑크족 전사들에게 있어 까다로운 법률의 집행이란 누군가의 두개골을 까부숴 뇌가 어느 정도로 드러나게 되었는지에 따라 다른 양의 벌금을 물리는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많은 명예로운 전사 귀족들은 그러한 깐깐한 법률 대신 당사자의 친척들을 통한 정의의 복수를 선호했다. (연대기의 어떤 귀족들은 종종 복수 대신 벌금을 건네받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언제 다시 복수의 도화선이 타오르기 시작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맹세를 하는 것, 그리고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법적 절차의 일부가 될 정도로 용인되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당신이 해당 문제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진지하단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도 막부의 일본과는 달리) 서유럽의 중세 농민들은 대부분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고, 평화로워 보이는 중세 촌락들의 살인율은 20세기 디트로이트 우범지대보다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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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세는 또한 신앙에 의해 지배된 시대였다. 

 

 평신도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던 이교적 전통이나 폭력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예찬은 어느 시기고 성직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중세인들의 삶 그 자체에 종교적인 영향이 어느 때고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동기 양자가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하지만, 중세인들에게 둘은 불가분한 것이었다. 즉, 더 많은 종교적 권위를 갖게된 성공한 자가 세속적 영역에서도 부와 명예를 갖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고,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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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십자군이었다. 

 

 이교도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는 것은 곧 물질적 성공인 동시에 전사로서 명예로운 행위였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4. '중세에 남은 로마의 흔적'에서 계속)
 
 

 

원래쓴곳 (퍼가실 때엔 출처를 표기해주세요)

 

 

 

 

 

참고문헌:

Reynolds, Susan. Fiefs and vassals: the medieval evidence reinterpreted. OUP Oxford, 1994.

Fried, Johannes.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Wickham, Chris.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6.

세부적인 내용은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시리즈나 Cambridge Medieval Textbooks 시리즈의 책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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