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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1E7TwQ44vU

디나모 키예프 응원가 락버전
그들은 조국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려운 결정하였다.
파괴된 키예프
1930년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한 일부였고, 마침 소련에서는 축구붐이 불고 있었고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많이 나타났다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축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큰 위안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축구클럽
디나모 키예프는 소련경찰 NKVD의 지원이 있었다.
1938년 디나모 키예프는 러시아 리그를 우승을 하였으나, 1939년/1940년에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독소전쟁 요약하는 그림
그러나 1941년 리그가 갑자기 중단이 되었다
바로 나치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22일 침공해온것이다. 몇몇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은 육군으로 참전했고 일부는 전사했다.
독일이 키예프로 접근해오자 선수들은 도시들을 방어하는데 앞장섰다
독일군의 맹공을 퍼부었지만 의외로 키예프는 선전했다
도시의 죄수들을 포함해 디나모 사수에 나섰다.
그러나 독일군이 나치로부터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을 강화하였고 결국 60만명의 소련 병사들을 생포하며 디나모를 점령했다
점령이후 독일은 포로들을 분류하는 직업을 시작해 이용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노동자로 썼지만 필요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사살했다.
그리고 분류되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돌려보냈는데 그 중에는 9명의 디나모 키예프 선수가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잃었고 굶주리고 있었다.
코일라(애칭)가 내가 어쩔수 없이 살고 있는 장모님 집이 있는 크레샤틱 거리에서 만나 나에게 왔어요.
그는 나와 이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다른 친구들을 찾아나서기로 했죠. 우리는 쿠즈멘코와 스비리도프스키를 찾았고 이들과 함께 다른 친구들을 찾아나섰죠
-곤차렌코의 회고-
이때 키예프의 빵집에서 한 선수가 일하고 있었다 디나모 키예프의 골키퍼였던 미콜라 트루세비치였다.
빵집사장이였던 로시프 코르딕이 디나모 키예프이라서 쉽게 취직을 했는데 독일 출생이였던 그는 나치의 감시에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코르딕은 좋아하는 축구를 못하는 트루세비치를 항상 안쓰럽게 생각을 했고
어느날 그에게 빵집의 이름을건 축구팀을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트루세비치는 당당 승낙하고 선수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마카르 곤차렌코를 찾았고 같이 선수들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선수 11명을 찾았고 이들을 모아 마침내 1942년 'FC Start', Fc 스타트 라는 축구팀을 만들었다.
FC 스타트는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디나모 키예프 출신 8명
미콜라 트루세비치, 미하일 스바리도프스키, 미콜라 코로츠키흐, 올렉세이 킬레멘코, 표도르 티우체브, 미하일 푸티스틴, 이반 쿠즈멘코, 마카르 곤차렌코
로코모티브 출신 3명
블라디미르 발라킨, 바실 수카레프, 미하일 멜니크
우리에겐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경기장에서 우리의 영광과 함께 싸울 수 있었다
디나모와 젤도르 (로코모티브) 선수들은 하나의 색으로 된 유니폼을 입고 하나의 색으로 된 깃발을 걸었다
파시스트(나치)들은 이 색이 자신들의 패배를 뜻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미콜라 트루세비치-
첫 경기는 1942년 6월 7일에 열렸는데 지역 리그에 참가해 다른 축구팀인 루크와의 대결로 7:2로 완승했다.
이 지역 리그에 참가하기는 선수들로서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 지역 리그는 루크의 게오르기 스베초프가 만든 리그인데 바로 그가 나치 부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치의 키예프 일대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리그를 만든것 이였다.
그러나 선수들은 자신들이 뛰는 일이 키예프 시민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일이라 믿고 뛰기로 결심했다.
선수들은 항상 도시를 위해 뛴다는 것을 강조 하였고 그들은 창고에 버려져있던 물건을 찾아 빨간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다.
Fc Start는 한번도 지지 않았다. 이후 독일의 군인팀들과 경기한 FC스타트의 전적은 이렇다.
나치는 처음에는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와 루마니아 수비대중에서 축구를 좀 한다는 선수들을 불러서 경기를 했으나 크게 패배를 하자 독일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하는 경력 있는 선수들을 불러 경기를 가졌지만 크게 패배했고
이에 나치독일은 샬케에서 프로 선수단들을 데려와 새로운 올스타를 만들었지만 크게 패배를 하였다
이에 당황한 나치는 축구 좀 한다는 헝가리 선수들을 불러 맞싸우게 하였으나 크게 패배를 하고 재경기에서도 3:2로 패배를 했다
나치는 쓸쓸히 자존심이 꺾이는 것이 싫어 나치 내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최강 공군으로 구성된 Flakelf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그러나 Flakelf가 5:1로 패배하자 다시 경기하자고 제안을 내밀렸다
경기 포스터 "복수" 를 다짐하는 의미의 글귀가 쓰여져있다
슈츠슈타펠 간부는 재경기를 제의하고 그 경기의 심판을 맡았는데 경기전 FC start 라커룸으로 가서 경기를 할때 우리의 방식대로 할테니 항의하지 마라,(사실상 맘대로 한다는 뜻)
이긴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 라는 협박을 날린다.
선수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경기전 나치의 깃발로 장식된, 무장을 한 나치 군인들이 지켜보는 경기장내에서 나치 경례도 하지않고 경기를 한다.
Flakelf과 FC스타트 선수단들
나치 경례하는 Flakelf 간부들
축구를 빙자한 나치선수들의 무자비한 태클과 폭행에 전반에 한골을 먹으며 하프타임이 되자 경기를 주선한 간부는 선수단에게 지금도 늦지않았으니 경기를 포기하고 몰수패를 한다는 조건에 승낙하라고 협박하지만 선수단은 당당히 싫다며 협박을 거부한다.
후반이 시작되어도 나치 선수들은 무자비한 반칙과 폭력축구를 하지만 선수단의 의지를 막을수는 없었고, 결국 4:2로 극적인 승리를 한다. 경기 후 화를 억누르고 기회를 한번 더 준 슈츠슈타펠 간부는(거의 최후통첩)나치군으로 결성된 루크팀과 재대결을 한다.
이 경기에서 FC start는 8:0 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승리를 장식하며 슈츠슈타펠 간부를 결국 열받게 한다.
결국 게슈타포를 시켜 선수전원을 명목은 소련군 경찰이라는 억지 혐의를 씌여,
체포,취조실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한다.
결국 FC start의 결성을 주도했던 미콜라가 고문끝에 죽고, 나머지는 결국 시레츠 수용소로 끌려가 1943년 반독 파르티잔들과 결투끝에 4명이 죽었고 나머지 선수는 항전을 거듭하며 종전이 된후 고향에 돌아올수 있었다.
1943년 11월 16일 지역신문에서 이즈베스티야에 독일이 스포츠 선수를 사형 집행한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해방 후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다가 1958년 표트로 세제로프라는 기자가 이브닝 키예프 지에 "마지막 결투" 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면서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듬해나움 칼렌스키와 함께 생존자인 마카르 곤차렌코를 찾아 기억을 더듬은 것을 바탕으로 마지막 결투 (The Last Duel)를 출간해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구 디나모 키예프 구장인 제니트 스타디움 자리의 Fc Start 기념탑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은 1년에 한번씩 FC Start 기념탑을 찾으며 선조들이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죽음의 경기도 올해로 80주년이 된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하였고, 디나모 키예프도 소련리그가 아닌 우크라이나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떠올랐다.
죽음을 불사하고 우크라이나와 키예프를 위해 온힘을 다했던 FC Start의 투혼은 아직도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키예프 시민들에게 가슴깊이 새겨져있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단순한 경기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이 내제된 이 스포츠는 작은 축구공 하나에 선수단들의 운명이 달리기도 한다.
1971년 조각가 이반 호로비가 사건이 일어난 제니트 스타디움이 있던 자리에 세운 FC Start 기념탑에 스테판 올리니크는 이런 시를 남겼다.
우리들의 아름다웠던 이들에 대하여
그들은 싸우다 쓰려졌지만
그들의 영광은 절대 바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영웅들이여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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