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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약간의 오역, 오류 있을 수 있음)

(열람 주의, 매우 적나라한 내용을 담고 있어 경우에 따라 혐오스러울 수 있음)

main-qimg-995177acabaa25b30074afd77d62bb95-lq.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 육군 병사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제네바 조약에 서명하기는 했으나

적국 병사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그 대우가 상당히 달라졌다.

 

전반적으로 서방 연합군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대우를 받았으며

소련군, 폴란드군, 흑인, 유대인 포로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1.폴란드군 포로

 

Polish_POWs_shot_by_Wehrmacht_1939.jpg.ren.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Ciepielów에서 독일 국방군에 의해 처형된 300명의 폴란드군 포로들, 1939년)

 

폴란드 침공에 앞서서 독일군 지휘부는 폴란드인을 열등 인종(Untermenschen)으로 규정하여

인간적인 포로 대우를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폴란드군 포로를 "강경하게" 다뤄도 문제가 없음을

독일군 병사와 장교들에게 공표했고

 

또한 왜곡된 인종적 선전으로 독일군 병사들에게 폴란드인에 대한 증오를 심었다.

 

5a511c26-e7e9-41fd-850a-920b073ff8ab.jpg.pagespeed.ce.1q3rp7g_Bw.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Ciepielów에서 학살당한 폴란드군 포로들의 모습)

 

이에 독일군 병사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폴란드군 포로를 학살하거나 고문했다.

 

Ciepielów(치에피엘루프)에서는 하루만에 무려 300명의 폴란드군 포로들이 학살당했으며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한 뒤 공포에 질려 자비를 간청하는 폴란드군 포로들을 처형해버리거나

포로를 나무에 묶어놓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건물에 포로들을 집어넣고 불을 놓아 태워죽이거나

Śladów에서는 강가에 포로들을 몰아놓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총에 맞아 죽거나 익사하게 만드는 등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고 독일군의 잔혹함에 폴란드인들은 공포와 분노에 떨었다.

 

이후에는 소련군까지 폴란드 영내에 진입하여 그 악명 높은 "카틴 학살"을 자행하여

2만 2천명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하며 폴란드에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2.소련군 포로

 

soviet pows.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1941년 독일 국방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 포로 무리

소련군 포로는 독일군의 포로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폴란드군 포로와 마찬가지로 소련군 포로도 열등 인종으로 규정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나치 독일과 배치되었다.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 볼셰비즘에 찌든 소련군 포로는 "절멸 대상"이었고

따라서 독일군에게 있어서 이들은 어차피 학살해야 할 대상이었기에

최소한의 포로로써의 권리와 보호마저 소련군 포로에게는 부정되었다.

 

종전까지 500만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가 독일군에게 붙잡혔고

이들 중 무려 약 3백만명이 넘는 인원이 전염병, 아사, 학살로 사망했다.

이는 일본군이 포획한 미군 포로 사망률조차도 뛰어넘는 수치였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는 소련군 포로 학대를 되려 조장하는

소련군 포로 대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1) 소련군 포로들은 볼셰비즘에 찌든 자들이므로 다른 국적 포로와 다르게 대우할 것

 

(2)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는 즉시 사살할 것

 

(3) 불복종이나 저항을 시도한 포로는 즉각 "무력"(총, 개머리판, 총검)으로 제압할 것.

해당 명령을 수행하는 독일군 병사가 이를 무기 없이 또는 충분한 무력으로

수행하지 않을 시 그들은 군법 위반으로 처벌될 것임

 

 

이와 더불어 정치장교 명령 (Commissar Order)을 내려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 장교는 무조건적으로 즉결 처분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1bb2e55e-960e-4393-9b3d-44bf7d5ca008.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포로수용소를 향해 강제로 행군하는 소련군 포로들의 무리의 모습.

 

이들은 물, 식량, 의료품 없이 포로 수용소까지 장거리를 행군하도록 강요받았다.

대열의 포로들은 구타 및 매질에 시달렸고 낙오자는 즉결 총살되었다.

 

이때의 참상은 일본군이 미군 포로에게 저지른 "바탄 죽음의 행진"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영화 스탈린그라드(1993)에서도 소련군 포로 무리를 강제로 행군시키며

뒤쳐지는 포로에게 무차별 구타를 가해 죽이는 독일군의 모습이 묘사된다.

11.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소련군 포로와 이를 무심하게 지켜보는 독일군 병사들

급박한 전황이나 물자 부족으로 포로 수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는

전투중에 포로를 잡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항복해오는 소련군 포로들을 모두 사살하거나

 

포로 수용소로 향하던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소련군 포로들을

그 자리에서 학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1024px-Himmler_besichtigt_die_Gefangenenlager_in_Russland._Heinrich_Himmler_inspects_a_prisoner_of_war_camp_in_Russia,_circa..._-_NARA_-_540164.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수척한 소련군 포로와 마주하는 힘러

 

대규모로 발생한 소련군 포로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또는 이들을 제대로 대우할 필요를 못 느낀) 독일군 지휘부는

맨땅에 작대기 몇개를 꽂고 철조망을 둘러 만든

포로 수용소라 부를수도 없는 장소에 포로들을 대거 수감하였다.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에게 지급된 식량, 의료품, 의복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추위, 기아, 전염병, 경비병의 학대로 소련군 포로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극심한 기아와 식량 보급의 부재로 수감된 포로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포로들은 기아를 견디기 위해 풀, 나무껍질, 애벌레, 나뭇잎을 먹어 치웠으며

 

심지어는 포로끼리 서로 잡아먹는 식인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식인을 하다가 적발된 포로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기아를 견디지 못한 포로들은 독일군 경비병에게 "자신을 쏴 달라고" 애원하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Bundesarchiv_Bild_101I-267-0111-37,_Russland,_russische_Kriegsgefangene_(Juden).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유대계 소련군 포로의 모습, 군복에 부착된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이 눈에 띈다.

유대계로 확인되었거나, 사상적으로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소련군 포로들은

SS가 관할하는 독일 영내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더욱더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곳의 환경과 처우는 더더욱 가혹했고 화장 시설이 마비될 정도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정치범, 유대계, 병약한 포로들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내져 학살되거나 생체 실험에 소모되었다.

 

Bundesarchiv_Bild_192-208,_KZ_Mauthausen,_Sowjetische_Kriegsgefangene (1).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소련군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

1942년 중반까지 무려 22만명의 소련군 포로가 독일 영내에서 사망했고

소련군 포로 수용소의 처참한 모습과 그에 대한 소문은 종종 독일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나치가 비밀리에 수집한 독일 국민들의 해당 문제에 대한 여론이 있다.

(일명 Meldungen aus dem Reich)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정을 표했을까?

 

독일 국민들의 여론은 아래와 같았다.

 

"독일에 소련군 포로들이 너무 많이 있다. 그들 때문에 독일의 식량 문제가 걱정된다. 포로들에게 최소한의 식량만 주어지거나 그냥 전부 죽였으면 좋겠다."

 

Reburial_of_Soviet_prisoners_of_war_killed_in_the_Hanover_Wuelfel_massacre.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1945년 하노버에서 대량으로 학살당한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

 

독일군이 소련군 포로를 상대로는 저지르는 만행은

소련군 수뇌부의 입장에서 경악하고 분노할 사실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전(프로파간다)거리이기도 했다.

 

마치 일본군 수뇌부가 "귀축영미에게 포로로 잡히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거세당해 끔살당할 것"이라 휘하 장병들을

세뇌시킨 것처럼 소련군 수뇌부도 휘하 장병들에게 독일군의 만행을 보여주며

분노와 저항 의지를 고취시키고 항복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Clkz8g7WgAAKoau.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독일군 정찰조에 항복하는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

 

독일군의 만행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개전 극초기에만 해도

소련군 병사들은 "그래도 폴란드에서 같이 싸웠으니 제대로 대우 해주겠지"라는 생각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독일군에 대거 항복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소련군 수뇌부의 선전과 더불어 독일군의 만행을 지켜본 소련군 병사들은

더 이상 쉽사리 항복하지 않게 되었고 일부 격분한 병사들이 독일군 포로를

상대로 보복을 저지르는 일까지 발생했다.

 

소련군도 보복 차원에서 독일군 포로를 대거 총살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심지어는 신체를 훼손하는 끔찍한 고문을 가해 죽이기도 했다.

 

문제는 보복은 다시 보복을 불러온다는 점.

독일군도 소련군의 보복 행위를 목격하고 더더욱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51TTnxABenL._AC_UF1000,1000_QL80_.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소련 여군 참전병들의 증언을 모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소련 여군 참전병들의 증언을 모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참혹한 만행이 적나라하게 언급되는데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 숲 주변에 빨치산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있는 거야.

그때 독일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세상에,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말이 안 나와.

다들 갈기갈기 찢겨서는... 내장은 내장대로 돼지 내장처럼 다 쏟아져나와 있고..."

(P 248)

"우리 간호병 하나가 독일군에게 붙잡혔어... (중략)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

놓았더라고.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P 243)

"(중략) 부상병들을 버려둔 채 가버렸지. 나중에 부상병들이 누워 있던 구덩이에 가봤어.

눈알이 뽑혀 죽은 사람, 배가 터져 죽은 사람... 그 끔찍한 광경을 본 나는 밤새 속이

까맣게 타버렸어."

(P 264)

 

"(중략) 마을 길가에 불타버린, 임시건물이었는지 집이었는지 식별이 안 되는 건물 잔해

같은 게 흩어져 있더라고. 완전히 타버려서 새까만 돌만 남아 있었지. 건물 터만...

(중략) 가서 보니 잿더미 속에 사람 뼈들이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모양이 보이는데... 그건 거기서 불타 죽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상병들이나

포로들이었다는 의미였지. 그 일을 겪고 난 후로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어."

(P 74)

 

전쟁이 진행될 수록 독일군의 만행 역시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전쟁이 격화되어 포로를 더는 관리할 수 없게 되자 헛간에 포로들을 가두고 산채로 불태워죽이거나

패전이나 소련군의 보복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붙잡은 소련군 포로의 눈알을 파내거나, 사지를 톱으로 자르거나,

내장을 뽑거나,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뭉개 죽이는 등 끔찍한 고문을 가해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체 훼손을 동반한 포로 학살 사례는 동부 전선에서 빈번히 보고

되었으나, 서부 전선에서는 후술할 "베레트 학살 사건"을 제외하고는 보고된 바가 없다.

 

그만큼 독소 전쟁의 참혹함과 독일군의 잔악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55-7.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소련군 여군 포로들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우했으나

 

그 중에서도 유대인, 정치장교와 더불어 더욱 잔혹하게 다룬 대상이 바로 여군이다.

 

나치 독일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여성이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여겼고 이 때문에 베를린에서 패전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도

보조 인원을 제외하고서는 여군은 일체 동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소련 여군의 존재는 독일군에게 있어서 "볼셰비즘의 타락한 상징"과도 같았고

 

독일군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는 아예 "여군 포로는 포획하지 말고

현장에서 즉결 사살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했다.

 

포획된 소련군 여군 포로들은 대부분 즉각 총살되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집단으로 강간을 가하거나 음부에 총검이나 야전삽을 꽂는 등의 성고문을 가해 죽이기도 했다.

(통념과는 달리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소련군 그 이상으로 광범위한 강간과 성범죄를 자행했다. 독일 측 보고

에 의하면 무려 1000만건의 강간 사례가 보고되었다.)


때문에 소련군 여군들은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일이 빈번했다.

포로로 잡힌다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A German prisoner of war escorted by a Soviet soldier, Stalingrad, 1943.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소련군에게 붙잡힌 독일군 포로의 모습, 1943년 스탈린그라드

 

 

소련과 동유럽을 짓밟으며 지옥도를 펼치던 독일군은

전세가 역전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그동안의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소련군 수뇌부는 독일군 포로를 죽이지 말고 산 채로 포획할

것을 명령했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독일군의 잔혹한 만행을 지켜보며 독기가 오른 소련군은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이 사실을 매우 잘 아는 독일군과 SS 병사들은 소련군에게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고

극렬하게 저항했다.

 

voluntarily-surrendering.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독일군 병사들

 

종전까지 약 3백만명에 달하는 독일군 포로가 소련군에게 포획되었지만

소련 내의 열악한 수용소 환경과 소련군의 보복으로 최소 50만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3.서방 연합군 포로 (미군-영국군-캐나다군)

 

US pow.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벌지 전투 당시 독일군에게 항복하는 미군 병사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폴란드군, 소련군 포로와는 다르게

나치 독일의 인종적 기준에서 비교적 우등하게 여겨진

서방 연합군 포로(미군-영국군-캐나다군)들은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us pows2.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벌지 전투 당시 독일군에게 항복하는 미군 병사들

 

즉결 처형, 기아, 학대에 시달리던 소련군 포로와는 다르게

이들에게는 "비교적" 인도적인 대우가 이루어졌다.

 

부상병은 야전 병원에 보내 치료해주었고 식량과 의약품도 부족하지 않는 선에서

배급해주었다.

 

독일군은 전쟁 동안 총 93,941명의 미군 포로를 포획했는데

이 중 사망한 인원은 1,121명에 불과했다.

(반대로 일본군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 27,465명 중 사망자는 무려 11,107명에 달했다.)


이러한 독일군의 상대적으로 관대한 포로 처분 덕에

피의 보복과 증오로 얼룩진 동부 전선과는 다르게 서부 전선에서는

양측이 서로의 포로를 상식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주된 분위기가 되었다.

 

wahlhausen.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룩셈부르크 발하우젠에서 단체로 독일군에게 처형당한 미군 포로들의 시신

 

그러나 이것이 서방 연합군 포로들이 나치 독일의 만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사례가 "말메디 학살 사건"이다.

 

 

Q-Win23-Malmedy-1-crop-2000x1126.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말메디의 눈밭에 파묻힌 학살당한 미군 포로들의 시신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의 비록 서방 연합군 포로의 생존률이 매우 높기는 했으나

 

이 수치가 "수용소에서 수감된 포로들"을 기준으로 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즉슨 현장에서 처형된 포로들의 사망 케이스는 집계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동부 전선만큼의 스케일은 아니었으나 독일군 역시 서방 연합군 포로를 즉결 처분한 사례가

상당 수 존재하는데

 

 

 

68bb6123-c58e-4576-85fc-2290fa3cad40.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말메디의 눈밭에 파묻힌 미군 포로들의 시신

대표적인 예가 제1 SS기갑사단 LSSAH 휘하 무장친위대가 약 300명에 달하는 미군 포로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학살한 말메디 학살이 있다.

 

말메디 인근에서 포위된 미군들은 "독일군은 우리 같은 미군 포로는 안 죽인대"라는 생각에

저항을 포기하고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들을 포로로 잡은 제1 SS기갑사단 LSSAH는 뚜렷한 이유 없이

평원에 모여있는 미군 포로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학살했다.

 

일부 미군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했으나 대부분 사살당했고

 

학살이 이루어진 후에 SS는 쓰러진 포로들의 급소나 복부를 걷어차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총격을 가해 확인 사살하는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

 

무장친위대는 소련군 포로 뿐만 아니라 서방 연합군 포로도 잔인하게 다루었으며

거의 즐기듯이 포로를 학살했다.

 

서방 연합군 포로를 상대로 독일군이 자행했다고 알려진 포로 학살은

모두 SS가 자행하였고 이 때문에 친위대는 연합군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후에 국방군 무오설의 근거가 되기도 했으나 국방군도 서방 연합군 포로를 학대하거나 처형한 사례가 존재한다.)

 

 

LeParadisMassacre_site.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르 파라디 학살이 이루어진 헛간의 외벽

말메디 학살 이외에도 SS 토텐코프 사단이 영국군 포로 97명을 잔혹하게 학살한

"르 파라디 학살" 사건이 있다.

 

프랑스 르 파라디에서 끈질긴 저항 끝에 탄약이 모두 소진되자 영국군은

"정상적인 포로 대우"를 기대하며 독일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독일군이 하필이면 토텐코프 SS 사단이였고

 

SS는 영국군 포로들을 헛간의 외벽에 줄세운 뒤 MG34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학살했으며 생존자들은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여담으로 2명의 영국군 병사가 이 학살에서 살아남았는데 이후 은신하다가 국방군에게

포로로 잡혀 살아남았다. 독일군에게 학살당할 뻔하다가 독일군에 의해

목숨을 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온 것이다.

 

rw091c.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프랑스 그래뉴(Graignes)의 교회 잔해와 추모비

또 하나의 사례는 "그래뉴 학살"이다.

 

위의 르 파라디 학살과 말메디 학살에 비하면 인지도는 극히 떨어지지만

잔악함은 그 둘에 못지 않다.

 

카랑탕(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곳이다.)으로 향하던 독일군 SS를 막아세우며

맹렬하게 프랑스 그래뉴(Graignes) 지역에서 저항하던 미군은 부상자가 속출하여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이라면 적어도 인도적인 포로 대우를 해줄 것이다"라는 기대에

그들이 임시 기지로 사용하던 위 사진의 교회 건물에 백기를 걸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독일군 역시 17 SS장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 즉 무장 친위대였다.

 

bataille_graignes_014.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에이브러햄 소피안 대위의 생전 모습

 

미군 병력을 지휘하던 에이브러햄 소피안 대위는 포로들의 대부분이 부상병이라는

점에서 인도적인 대우를 호소했으나 SS는 이를 무시하고 포로들을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다.

 

SS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 17명 중 5명은 산 채로 총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9명은 인근 평원으로 압송한 뒤 그곳에서 그들의 무덤을 직접 파게 한 뒤

총살했다.

 

소피안 대위를 포함한 장교급 포로 3명은 정보 수집을 위해 억류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SS는 그들 역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인근의 초원으로 끌고간 뒤 총살했다.

 

소련군 포로보다는 사정이 나았으나 서방 연합군 포로 역시 포로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외에도 캐나다군 포로 156명이 학살당한 아르덴 수도원 학살 사건

프랑스군-영국군 포로 81명이 수류탄-총살로 학살당한 Wormhoudt massacre 학살 사건이

존재하며

 

지상에 불시착한 미 공군 파일럿들이 독일 주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사망한 "뤼셀스하임 학살 사건"도 존재한다.

 

아무리 "관대하고 상식적"이라고 해도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기에 서부 전선도 포로 학살 사례가 독일군, 연합군

양측에서 다수 존재한다.

 

black-americans-world-war-ii-gettyimages-50481386.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흑인 미군들의 모습

 

비록 소수긴 했으나 흑인 출신의 연합군도 엄연히 참전하여 독일군과 전투하였는데

 

이들은 나치 독일의 기준에서 왜곡된 인종적 이데올로기의 기준에서

"인간 이하의 짐승"과 같은 존재였기에 소련 여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이들을 포로로 잡지 않았다.

 

sen.pn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독일군에게 항복한 세네갈계 프랑스군 병사들. 이들은 항복 직후 처형당했다.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이 동원한

아프리카계 식민지군도 마주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수의 흑인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 직후 이들을 포로로 잡은 독일군은 "흑인과 같은 열등한 존재는 우월한 아리아인과

전투를 할 자격조차 없다." 라는 명목 아래에 이들을 포로로 잡는 족족 처형했다.

 

또한

말메디 학살과 동시에 일어난 "베레트 학살"(Wereth massacre)이 그 참상을 잘 보여주는데

 

벌지 전투 당시 베레트 지역에서 고립된 흑인 미군 포로 11명은 아무 저항 없이 독일군에게

항복했으나

 

이들은 말메디 학살을 저지른 악명높은 제1 SS기갑사단 LSSAH였고

이들을 매우 잔인하게 고문한 뒤 학살했다.

 

독일군은 포로들을 집단으로 구타한 뒤 총검으로 마구 찔렀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이빨과

턱을 뭉개버렸고, 총검으로 손톱을 모두 뽑고 손가락을 마디마디 잘라버렸다.

 

마지막에는 총검으로 눈알을 파냈고 움직이는 차량으로 아직 살아있는 포로들을 뭉개 죽였다.

 

MV5BMTA4NTY5MTExMTheQTJeQWpwZ15BbWU3MDc5ODY1MDQ@._V1_.jpg 나치 독일의 각국 포로 대우 (약혐 주의)
해당 사건이 모티브가 된 영화

 

독일군의 만행에 미군 수뇌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만연했고

희생자들이 "흑인"이었다는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미온적으로 수사에 임했고

안타깝게도 말메디 학살과는 다르게 전후까지도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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