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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e Taylor



인류역사에서 최초의 죄의식의 발생은 하나님이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연유한다.

따라서 죄의식에는 금지와 명령, 권위와 타부, 보상과 처벌 등의 개념들이 따라 붙는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법을 구성하고 있는 법률적 개념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테일러는 죄의식(guilty)을 법률적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죄의식을 ‘인간적 기원’ 혹은 ‘신적 기원’이 있는 법을 어겼을 때 나타나며 이는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 특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의식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테일러는 죄의식의 성립을 ‘인정’(acceptance)의 문제로 이야기 한다. 어떤 행위자가 자신이 행한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차이는 사회가 규정한 법률이나 신이 규정한 금지 조항에 대해서 어떤 권위나 명령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는 전제하에서 죄의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테일러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테일러는 엄밀한 규정이나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죄의식의 성립에 있어서 ‘인정’(acceptance)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행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그 스스로 그가 더욱더 합리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볼 때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든지 간에, 그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며 모든 인간이 죄의식을 본래적으로(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 죄의식은 과연 감정과 관계되는 것인가?
만약 죄의식이 감정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어떤 감정과 관계되는가? 테일러의 논지대로라면 죄의식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치나 죄책감, 후회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분화될 수 있다고 한다. 테일러는 죄의식과 관련된 다른 감정들의 변별적 특성과 차이를 규정하고 이들 감정이 지닌 건설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어 보다 이상적인 도덕 감정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담론 분석

테일러는 죄의식(guilty)을 법률적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죄의식을 ‘인간적 기원’ 혹은 ‘신적 기원’이 있는 법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 모든 인간에 나타나는 본원적 의식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테일러는 죄의식을 느끼는 감정 자체를 인간의 한 근원적인 특성으로 이해한다. 유죄와 처벌, 참회(repentance), 용서, 권위, 보상 등의 말은 모두 인간 죄의식과 관련한 말들이다.

테일러는 죄의식과 죄의 감정을 구분한다. 그는 사람에 따라서, 죄의식은 있지만 죄의식의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죄의식과 죄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 사람이 외부적 대상의 조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제정된 법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거나 또 억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혹 법의 권위에 무관심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규정된 법을 아주 충실히 순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죄의식에 대한 감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식의 감정’유발은 금지된 어떤 것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테일러는 죄의식의 감정 유발을 행위자가 인식하는 ‘인정’여부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테일러가 죄의식의 감정을 굳이 구분해서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도덕 감정을 유발하는 수치와 죄책감을 이야기하면서 이들 감정이 모두 죄의식을 내함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전제로 죄의식의 감정을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수치와 죄책감을 거론하면서 외부 대상적 지향의식인 죄의식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조건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수치나 죄책감은 오히려 외부 대상적 지향의식이라기 보다는 자기 중심주의적 존중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인간을 자율적 존재로 행위할 수 있는 건설적인 의식임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본격적으로 죄의식과 도덕 감정(moral emotion)의 관계를 설명한다. 죄의식의 발생이 본질적으로 타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본다.

그는 여기서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하고 있다. 즉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부당하게 그 ‘자신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그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행위자와 연관된 ‘자신 스스로의 신뢰를 무가치하게 보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이 양자의 경우에 있어 죄의식은 스스로를 타자에게 행한 것과 관련시키고, 수치심은 자신을 자기만의 고유한 본성을 존속하고 유지(standing)하고자하는 의식과 관련시킨다. 반면에 죄의식은 그 자신을 수치심이 작용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본성을 존속하고 유지하는 것과 관련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죄의식은 ‘수행되지 않은 의무’와 ‘완성되지 않은 의무’(obligations)에서 생기기 때문에 수치심과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즉 수치를 느끼는 사람은 의무감에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의식을 느끼는 행위자는 그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강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죄의식을 느끼는 행위자의 생각은 주로 그 자신의 의무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더 우선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자의 권리침해나 보상의 문제의식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견지에서(situation)에서 자기존중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본다.

죄의식(guilty)과 죄책감(Remorse) :

테일러는 죄의식의 감정이 단지 행위자가 제3자에게 해를 입힌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자기평가(self-assessment)의 정서인 죄책감(remorse)과는 아주 다르다고 본다. 즉 죄책감과 후회(regret)는 정서(emotion)로서 주요한 ‘도덕적 감정’과 연관되어 있지만 죄의식은 보상(속죄, 처벌 등)의 목적을 지향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성적 감정과는 좀 떨어져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죄의식의 감정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그가 관여하는 느낌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보상해야만 한다는 심리적 기전이 작용하며 이를 보상했을 때 비로소 죄의식 이전의 상태로 복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테일러는 죄의식의 감정이 분명히 반성적 작용을 하는 측면도 있지만 죄책감처럼 더 적극적인 반성적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죄책감(remorse-양심의 가책, 후회)의 사유(thought)는 행위자 자신보다는 행위에 집중한다. 즉 죄책감은 양심의 가책(마음아픔의 감정, compunction) 혹은 깊은 후회를 통해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더 나아가 죄책감과 후회의 차이를 밝힌다. 즉 죄책감은 죄 혹은 도덕적 부정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면, 후회는 어떤 방식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러나 특별히 ‘도덕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후회는 행위자가 ‘자신을 인과적 책임과 관련시키지 않는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결부되지만 후회를 느끼는 사람은 행위와 결부되지 않는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에 대해 어떤 것을 꼭 해야만 한다는 ‘의무’(혹은 보상)가 남아 있지만 후회에는 의무나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롤즈의 견해 :

롤즈는 'feeling guilt'와 'feeling shame'에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feeling guilt'는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발생하지만, 'feeling shame'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이 반드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 해보자. 자신의 생각에 그러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정의(Justice)가 자신을 겁쟁이로 비추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수치를 느끼게 되지만, 자신이 자신의 침묵으로 인하여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다면 자신은 'feeling shame' 대신 'guilt'를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서 'guilt'를 느끼는 것은 부당하게 행위자 자신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그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롤즈는 설명한다. 그러나 'shame'을 느끼는 것은 자신과 연관된 신뢰를 'unworthy'하게 그 자신에 보였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 양자의 경우에 있어 'feelings of guilt'는 스스로를 자신이 타자에게 행한 것과 관련되지만 'feelings of shame'은 자신을 자기만의 존립(standing)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guilt는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존립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는 'feeling guilt'가 항상 타인을 전제로 한 상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도 관련이 있음을 더 보충적인 설명을 가한다. 즉 죄를 느낀다는 것은 분명 타자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자신의 내면적 가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자살을 시도한 이후 'guilty'를 느끼는 경우에는 자신이 타자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여 생명을 취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칸트적 입장에서 본다면, 행위를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에 대한 위반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guilty'를 느끼는 경우로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향상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바보 같은 텔레비전을 볼 때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일러는 'feeling guilt'가 ‘직접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롤즈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분명히 타자에게 상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feeling guilt'를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제시한다. 즉 ‘무지’에 의해 발생한 사건(교통사고와 외디푸스의 경우)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무지’로 행한 것은 비난과 책임보다는 최소한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의 정도에 머물 수 있는 것이지 'feeling guilt'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과적 행위(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또 지금의 이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을 충분히 인지를 하면서 저지르는 행위)에 의한 책임이야말로 'feeling guilt'에 적절한 타입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테일러는 'feeling guilt'를 모두 타자의 상해와 관련한 ‘principle of right’의 기준에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으로 전개할 죄의식과 관련해서 수치감, 죄책감, 후회 등의 감정적 분화를 설명하기 위한 잠정적 구도로 보인다. 그러나 테일러의 논변 밑바닥에는 여전히 ‘feelings of guilt'는 타자의 상해와 관련하며 'feelings of shame'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우선을 둔다’는 롤즈의 견해에서 완전히 독립해 있지는 않다. 그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하는 롤즈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타자의 상해와 관련해서 느끼는 'feelings of guilt'와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우선성을 둔 'feelings of shame'의 구분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feelings of guilt'와 'feelings of shame'이 타인을 의식한 것이든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의식한 것이든 모두 ‘금지’(Forbidden)에서 비롯되었고, 한 감정 안에서 죄에 대한 감정과 수치심이 명료하게 분화되지 않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의 분모가 있음을 인식한다.

말해지는 현상들

테일러는 죄책감을 사유의 적극적인 반성행위로 본다. 즉 죄책감의 사유는 단순히 외부 대상적 지향에서 나타나는 자기 훼손(disfigurement)이나 비천한 위치에서 이를 보상이나 처벌을 통해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반성과 행위와 결과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또 죄의식(Guilt)과 죄책감(Remorse)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동시에 경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죄의식과 수치, 그리고 죄책감이 명료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죄의식과 수치, 죄책감의 도덕성 여부를 이야기 한다. 먼저 수치는 분명 도덕적 감정으로 이름 붙이기에 적당하다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수치는 자기존중(self-respect)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반면 죄의식은 행위자가 ‘금지’ 혹은 ‘의무’와 관계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설명한다. 반면 죄책감은 도덕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본 데는 죄책감에는 이성이 수반한 가치가 동반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더 나아가 죄의식과 죄책감의 관계에서 죄의식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책감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즉 죄책감은 자기 존중적이며, 가치 중심적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생기기 전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매개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을 자신의 본원적 모습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감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쉘러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쉘러의 견해에 따르면 죄책감은 전적으로 건설적이라면, 죄의식은 단지 파괴적이다. 그는 정의에 의해 이 사실을 만들었다;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있어 파괴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죄의식으로 간주된다. 건설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죄책감으로 간주된다.” 테일러는 쉘러의 죄의식과 죄책감의 이분법적 도식에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여전히 쉘러가 구분한 죄의식과 죄책감은 분명 의미가 있으며 죄의식의 파괴적 의식은 죄책감의 건설적 의식으로 치유되는 것임을 말한다.

테일러의 의식에 있어서 죄책감은 분명 긍정적이고 보다 적극적인 사유의 한 형태로 받아들인다. 죄책감은 본원적인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적극적인 화해(reconciling)의 시작이기도 하다. 죄책감은 도덕 감정이면서 죄의식과 수치를 포함한 좀 더 넓은 개념으로 보고 있다. 죄책감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좀 더 객관화 주시할 수 있으며 발전의 한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명예로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명료한 판단과 구분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테일러는 죄의식이 대상 지향적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의 이목에 의한 판단,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 책임에 대한 의무와 보상을 통해 죄의식 이전의 상태로 복구되며, 또한 사유의 능동적인 과정의 개입이 없이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수동적 행위라고 본다. 반면 죄책감은 사람들의 이목이나 외부 대상의 권위에 억눌림이 없이 자신의 내면과 본래의 모습(integrity)인 본성에서 출발하면서 적극적인 사유의 과정이 동반하기에 인간본성을 회복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죄의식과 수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죄의식(guilt)과 수치(shame)

테일러는 guilty가 사회의 법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법은 준수해야만 하는 것이며 이를 어겼을 때는 형벌이 주어진다. 권위자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권위에 도전하였다면 응당 보응(retribution)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법 위반을 구성하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 guilty가 생기며, 여기에는 처벌과 용서가 내려진다. 처벌은 행위자의 ‘행위한 것’에 대한 것이며 그 ‘자신에게 대한 것’은 아니다. 죄와 처벌은 행위 혹은 실수(omission)에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테일러는 'guilty'가 수치심에 비해 국부적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치심은 국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행위보다는 행위를 한 ‘자신의 인격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guilty'는 강도를 ‘행한 점’에 초점을 맞추지만 'shame'은 그 자신이 강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행한 것이 그 자신과 떨어지지 않고 바로 그 자신이 된다. 여기서 테일러는 'guilt'와 'shame'의 미묘한 차이를 기술한다. 즉 guilt는 보상과 처벌에 의해 모든 상황이 복구되지만 'shame'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인격적 수치에 대해서 단순히 물질적 보상만으로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 형벌이나 용서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최선의 방법은 단지 숨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수치를 느끼는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테일러는 말한다.
 

죄는 수치에게는 없는 책임(reponsibility)과 관련된다. 우리가 행위한 것에는 책임을 져도 우리 자체를 책임 질 수는 없다. guilty는 그가 행위한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는 행위자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p.90)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부당하게 그 ‘자신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그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테일러는 말한다.

반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행위자와 연관된 ‘자신 스스로의 신뢰를 무가치하게 보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이 양자의 경우에 있어 죄의식은 스스로를 타자에게 행한 것과 관련시키고, 수치심은 자신을 자기만의 고유한 본성을 존속하고 유지(standing)하고자하는 의식과 관련시킨다.

반면에 죄의식은 그 자신을 수치심이 작용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본성을 존속하고 유지하는 것과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죄의식은 ‘수행되지 않은 의무’와 ‘완성되지 않은 의무’(obligations)에서 생기기 때문에 수치심과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즉 수치를 느끼는 사람은 의무감에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죄의식을 느끼는 행위자는 그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강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죄의식을 느끼는 행위자의 생각은 주로 그 자신의 의무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더 우선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자의 권리침해나 보상의 문제의식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견지에서(situation)에서 자기존중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본다.

테일러의 이러한 입장은 롤즈가 밝힌 feelings of guilt와 feelings of shame의 구분에 한 발짝도 더 나간 것 같아 보이지는 않다. 이제 그는 수치와 죄책감의 감정이 훼손된 자신을 복구하고자하는 심리적 기전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음 장에서 밝힌다.

훼손(Disfigurement)과 보상(Payment)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이든 아니면 자신에 의해서이든 저지러진 ‘죄’로 인해 외형적으로 혹은 내면적(정신적)으로 ‘훼손’을 입게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다시 복구 또는 회복되기를 원하는 심리적 기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기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죄의식이 강한 사람은 롤즈의 말대로 보상이나 형벌을 통해서 복구될 수 있고 수치심이 강한 사람의 경우는 보상이나 형벌 대신 자신의 인격이나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에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나쁜 행위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는 죄의식이나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으로 고통 받아 정신적인 분열이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일련의 모습들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복구하고자하는 심리적 기전이 감정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훼손으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심리적 기전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첫째,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상을 통해서 그 문제를 종결지을 수 있다.

둘째, 아마도 첫 번째 해결방안은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훼손을 점차적으로 조금씩 사라지게 함으로써 지속적이고 항상적인 방식으로 계속한다면 그 자신 안에서 변화를 조금씩 가져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그 자신에게 심각한 결과로 인해 죄의 고통을 계속 겪어야 할지 모른다.

첫번째 방안은 보상이나 형벌을 통해 복구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행위자의 행위가 타자에게 미칠 수 있는 손해를 보상하는 agents 의 역할에 좀 더 강조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보상을 통해서 죄의식을 모면하고자하는 인간의 유형에 적합할 것이다.

두번째 경우는 많은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이다. 적절한 보상과 적절한 죄의식을 느끼면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서서히 죄의식으로부터 멀어져 갈 수 있거나, 아니면 심각한 반성이나 죄책감이 결여된 채 자신이 저지른 죄에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라 어느덧 일상이 되어 반복해서 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경우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자, 그리고 자신 스스로와의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이중적인 삶의 전형적인 패턴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방안은 총체적인 나약함 혹은 광기나 정신적 분열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테일러는 두 번째 방안에 적합한 인물로 멕베스를 전형적인 인물로 설정한다. 처음 Duncan을 살인할 때 멕베스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 그는 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아멘’은 나의 목구멍 안에서 걸렸다.” 이 때 함께 살인을 공모한 멕베스의 아내가 멕베스에게 경고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들은 후에 우리를 미치게 할 것이다”(Ⅱ. ii). 맥베스는 결국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주 미치지 않게 된다. 살인자로 변한 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되지 않는다. 살인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그에게는 죄책감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세 번째 유형인 수치의 위협을 피한다. 맥베스는 그의 도착적인 성실함으로 그 자신을 끔찍한 행위의 행위자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제 그가 낯선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자신을 선과 명예로운 것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는 이제 ‘명예’가 무자비하게 어떠한 희생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는 새로운 코드에 의해 목표를 추구해 나간다.

멕베스의 아내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 그의 자아분열은 최종적으로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계속한다. 여기서 테일러는 분열(Dissociation)은 진정한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행위자는 자신에게 낯선 어떤 것을 초래하였다.

만일 그가 자신을 비난받지 않는 자신으로 회복하지 못하거나 변형된 자로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한 다면, 자신과 타자와의 타협이나 두개의 분열된 자아로서 자신을 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테일러의 논리대로라면 ‘분열’은 훼손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자하는 반응’일 수 있겠다. 그러나 테일러의 두 번째 유형의 분석방법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테일러의 두 번째 유형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나쁜 본성을 갖고 나쁜 죄악을 서슴없이 저지른 행악자의 모습도 모두 훼손된 본성을 회복하고자한 행위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 장에서 죄의식(Guilty)과 수치(Shame), 죄책감(Remorse) 그리고 후회(Regret)의 변별적 차이를 밝히고 이들 감정이 지닌 건설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어 보다 이상적인 도덕 감정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탐색한다.

나가는 말 : 죄책감-사유의 적극적인 반성행위

테일러는 죄의식과 수치, 그리고 죄책감은 모두 도덕적 감정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죄의식의 감정이 단지 행위자가 제3자에게 해를 입힌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자기평가(self-assessment)의 정서인 수치심이나 죄책감(remorse)과는 다르다고 본다.

죄의식은 보상(처벌)을 통해 이전 상태로 복구하지만 죄책감은 자기 회개의 반성적 사유를 통한 극복이라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의 가치가 수반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훼손(disfigurement)을 비천한 위치에서 이를 보상받거나 처벌을 통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이성의 측면으로 생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죄의식과 죄책감의 관계에 있어서 죄의식으로 회복할 수 없는 자기 극복은 죄책감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즉 죄책감은 자기 존중적이며, 가치 중심적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생기기 전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매개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을 자신의 본원적 모습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감정으로 보고 있다. 테일러의 이러한 견해는 쉘러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테일러에 있어서 죄책감은 분명 긍정적이고 보다 적극적인 사유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며 자신과 화해(reconciling)하는 작용이기도 한다. 그는 죄의식(Guilty)을 사람들의 이목에 의한 판단,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 책임에 대한 의무와 보상을 통해서 죄의식 이전의 상태로 복구된다고 보며, 또 사유의 능동적인 과정의 개입이 없이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수동적 행위로 인식한다.

반면 죄책감(Remorse)은 사람들의 이목이나 외부 대상의 권위에 억눌림이 없이 자신의 내면과 본래의 모습(integrity)에서 출발하며 적극적인 사유의 과정을 동반하여 인간본성을 회복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는 죄책감을 도덕 감정이면서, 죄의식과 수치심을 포함한 좀 더 넓은 감정으로 인식한다. 그가 분류해 규정한 죄의식(Guilty)과 수치(Shame), 죄책감(Remorse), 후회(Regret), 고결함(Integrity)은 개념적인 분류에 치우친 느낌이 있다.

한 감정 안에서 나타나는 이들의 문제를 과연 명료하게 재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인간의 감정에는 죄의식과 수치, 그리고 죄책감이 명료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테일러의 이러한 강제적 개념 분류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동안 죄의식이나 수치 그리고 죄책감, 후회 등의 감정이 부정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었다면, 오히려 이들 감정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능동적인 한 계기로 보고 이를 통해 더 적극적인 도덕 감정을 상향시킬 수 있다면 이의 분류와 규정은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개념 정리>

죄의식(guilty) : 법률적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죄의식은 자내적(自內的)이 아니라 대상지향적 의식에서 생겨난다. 법을 어겼을 때 유죄 guilty 가 되며 이러한 행위의 결과로서 처벌이나 용서가 따르게 된다. 금지에 대한 위반은 곧 죄가 되며 여기에서 guilty가 생긴다. 그리고 죄의식에는 의무와 책임이 개입되어 있다.

수치(shame) : 수치심은 대상지향적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내적인 의식의 개념이다. 의무와 책임보다는 자기 존중의 가치의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죄책감(Remorse) : 죄의식과 수치의 감정을 공통으로 내함하며 주로 자내적인 양심의 가책(compunction), 혹은 마음의 아픔의 감정을 수반한다. 혹은 깊은 후회(regret)도 동반한다. 죄책감은 는 죄 혹은 도덕적 부정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후회(regret) : 어떤 방식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러나 특별히 도덕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다. 행위자가 자신을 단지 인과적 책임과 관련시키지 않는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자료: 한국싸나톨로지 학술대회 발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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