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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5일 일요일 오전 8시,캐나다 토론토 국제공항(현재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
109명이 탄 DC-8-63 한대가 착륙을 준비하며 활주로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 항공기는 바로 에어 캐나다 621편.
몬트리올-도발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토론토 국제공항을 경유하여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까지 가는 항공편이었다.
기장은 피터 해밀턴,부기장은 도날드 롤란드,항공기관사는 H.고든 힐이였다.
오전 7시 17분에 몬트리올에서 이륙한 621편은 50분 정도의 비행후 오전 8시쯤에 중간 경유지인 토론토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잠시후 토론토 공항 관제탑에게 ILS 접근을 승인받았다.
곧바로 621편은 선회하며 토론토 공항의 32번 활주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약 1분정도 후 621편은 별탈없이 32번 활주로에 정렬된 상태로 접근할 수 있었고 곧 관제탑으로부터 32번 활주로로의 착륙을 허가받을수 있었다.
이제 착륙만 하면 되었고 조종사들은 천천히 기수를 들어올리고 하강하면서 착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공 60피트(18m) 지점에서 갑자기 621편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놀란 기장(사고당시 조종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급히 모든 엔진을 최대출력까지 높이면서 착륙을 포기하고 621편을 복행시키려고 하였으나,621편은 이미 활주로에 너무 가까이 있던 상황이였고 결국 621편의 우측 날개에 달린 4번 엔진이 활주로랑 충돌했다.
4번 엔진은 곧바로 날개에서 분리되어 활주로에 내동댕이쳐졌고,621편은 엔진 하나를 잃은채 복행할수밖에 없었다.
621편이 복행을 위해 상승하는 사이,621편의 엔진이 떨어져나간 부분에선 연료가 누출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점점 거세졌고,621편은 화재가 더 커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착륙해야 했다.
원래 착륙하려던 32번 활주로가 4번엔진의 잔해때문에 착륙이 불가해지는 바람에 대신 관제탑은 조종사들에게 23번 활주로에 착륙할것을 권유했다.
조종사들은 이에 동의했고,23번 활주로로 가기 위해서 621편을 우선회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1편은 23번 활주로로 가지 못했다.
4번엔진 탈락 2분 30초 후 621편이 막 우선회하고 있을때,4번 엔진 부근 연료탱크의 유증기가 점화되며 대폭발이 일어나 우측 날개 끝부분이 부러져나간 것이다.
곧바로 6초의 간격을 두고 2차,3차 폭발이 일어났고 621편은 3번 엔진과 우측 날개의 절반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621편은 3차 폭발 직후 우측으로 크게 기운채 추락했고,결국 한 농장의 들판에 시속 약 410km의 속도로 충돌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토론토에서 벌어진 참사에 캐나다 전역이 애도의 분위기가 되었고,캐나다 항공 안전 위원회(CASB,TSB의 전신)는 곧바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다행히 블랙박스는 문제없이 회수되었고,조사단은 블랙박스를 분석하면서 621편이 도대체 왜 착륙중 급하강했는지 알기 위해 621편의 잔해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사결과 사고당시 621편엔 아무런 결함이 없었단 것이 밝혀졌다.
사고당시의 기상상태도 비행에 별 문제가 안되는 수준이었고,테러나 버드 스트라이크의 흔적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사고가 날만한 원인이 없었던 것이다.
조사단은 도대체 왜 621편이 추락했는지 알수가 없었고,사건은 점점 미궁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조사단이 사고원인을 찾느라 낑낑대던 이때,블랙박스 비행기록장치와 조종실 음성기록장치가 분석되었고 조사단은 곧바로 블랙박스 기록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조사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블랙박스 기록 조사 결과,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사고원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사고의 원인이었던 걸까?
621편 추락현장을 찍은 사진중 가장 유명한 사진,안타깝게도 이인형의 주인이었던 8세 여아 역시 사망했다.
사고원인은 바로 부기장의 스포일러(펼쳐서 보조익이나 스피드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양쪽 날개에 달린 장치로 착륙시에 양력을 줄여주어 브레이크 효율을 높여줌) 조작 실수였다.
부기장은 과거부터 착륙시 플레어(접지 직전에 기수를 약간 들어올리는 동작) 단계에 스포일러를 사용하는 버릇이 있었는데,이날도 플레어 단계에서 스포일러를 arm 상태(항공기가 착륙하면 스포일러가 자동으로 전개되게 하는 상태)로 설정하려다 실수로 완전히 전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착륙때문에 엔진출력을 줄이고 기수를 올리느라 속도와 양력이 줄어들고 있던 621편은 완전히 펼쳐진 스포일러로 인해 치명적인 수준까지 양력을 잃어버렸고 결국 실속해 활주로를 향하여 급하강했던 것이었다.
결국 621편 추락사고는 부기장의 실수가 부른 인재였다.
조사단은 최종보고서에서 조종사들의 스포일러 조작 실수가 사고를 일으켰다고 발표했고,사고의 재발을 막기위해 DC-8 기종의 그라운드 스포일러가 비행도중엔 전개되지 않도록 고쳐야 하며 적어도 스포일러 작동 레버에 방지용 가드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에어 캐나다는 스포일러 운용에 대한 명확한 교육을 조종사들에게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FAA는 조사단들이 621편 사고의 원인과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수있는 방법을 정확히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DC-8의 스포일러 설계를 고치도록 하는 대신 조종석에 경고 플래카드를 설치하는 수준의 감항성 개선 지침을 발표하는 정도로 사건을 어영부영 마무리했고 결국 근본적 문제인 공중에서 그라운드 스포일러가 전개된다는 것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채 621편 사고는 종결되었다.
항공업계는 621편 사고를 보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교훈을 얻지못한 대가는 2년 후 일본항공이 치르게 되었다.
1972년 11월 28일,모스크바에서 이륙하던 일본항공 446편이 621편과 똑같이 조종사의 스포일러 조작실수로 인하여 추락해 6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446편 사고 후에야 항공업계는 부랴부랴 DC-8의 그라운드 스포일러가 비행중에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를 변경했고 이후로는 이착륙중 스포일러가 전개되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621편 추락 43년 후인 2013년,621편이 추락한 온타리오 주 브렘튼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추모비가 세워졌고 이와 동시에 대규모 봉헌식이 열려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621편 사고 희생자 109명의 명복을 빕니다
여담- 621편 사고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기장과 부기장의 상호존중이 추락에 기여한 사고였다.
사실,해밀턴 기장과 롤란드 부기장은 예전부터 스포일러를 작동시키는 시점에 관해 의견차가 있었다.
해밀턴 기장은 착지 직후에,롤란드 부기장은 플레어 중에 스포일러를 작동시키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이것때문에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두 조종사는 기장이 조종간을 잡고있을땐 기장의 선호대로,부기장이 조종간을 잡고있을땐 부기장의 선호대로 스포일러를 조작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대로라면 사고당시 621편의 조종간을 잡고있던건 해밀턴 기장이었으니 해밀턴 기장이 스포일러를 조작해야 했다.
하지만 이날 해밀턴 기장은 롤란드 부기장에게 스포일러 조작을 양보해주었고,이때 롤란드 부기장이 스포일러 조작을 실수해버리는 바람에 621편은 추락하게 된 것이었다.
만약 해밀턴 기장이 권위주의적이어서 롤란드 부기장의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착지 직후에만 스포일러를 사용하게 했거나,이날 해밀턴 기장이 롤란드 부기장을 존중하지 않아 스포일러 조작 권한을 양보해주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대한항공 8509편의 추락을 부른 권위주의가 여기서는 추락을 막을수도 있었다니,참으로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