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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1)

 

 

 시민들(civility)에 의해 구성된 도시들(civilitas)은 서로 모여 제국을 형성하고, 문명(civilisation)을 낳는다. 도시의 시민들은 고전에 대한 교양을 쌓고, 글줄을 쓰는 능력을 길렀으며,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는 통치 엘리트로서 거듭난다. 제국은 서로 비슷비슷한 양식을 지닌 도시들을 영원히 재생산하는, 자가복제의 길을 걸음으로서 서서히 형성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5세기에 벌어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적어도 서유럽 지역에 국한된(로마의 나머지 절반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이후로도 일천년간 유지된다), 문명사적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2)
 

 

1. 어째서 제국의 서쪽 절반만 몰락했을까?

 

 이에 대해서 지금껏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여러 장기적, 구조적 원인들과 우연적, 단기적 사건들을 들어 설명하고자 했다. 구조적으로는 제국을 두 개 이상으로 분할해 통치하는 정치적 방식의 도입이나, 우연적으로는 야만인 집단의 쇄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고위 정치인들의 전략적 실책 등이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지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들이야 어찌되었건, 한 번 몰락이 시작되자 더이상 돌이킬 수는 없는 되먹임고리가 형성되었다. 제국의 분할은 다시 서로마에서 갈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분열로 되풀이되었고, 반달족의 카르타고 침탈은 세수의 고갈과 그로 인한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3)
 

 

 2. 로마 내부로 쇄도해들어온 야만인 족장들은 대부분 그들의 토착언어와 라틴어 모두를 구사할 줄 아는 이중언어 구사자였으며, 문화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들은 로마의 귀족처럼 옷을 입었고, 로마의 귀족들과 통혼했으며, 로마의 고전들을 탐독했다. 야만인 족장들이 토착 로마인들과 다른 점은 오직 그들이 물려받은 조상 대대로의 계보와 이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로마에 두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야만인 지도자들 및 그들의 세력은 완전히 로마화되었지만, 성공적으로 도시와 요새를 정복한 이들은 피지배민들과 자신들을 명확히 구분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고트족이나 프랑크족 등으로 정체화했다. 그리고 제국이 멸망한 옛 터에는 이런 독립적인 야만인 지도자들의 정치체가 수없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4)

 

3. 제국이 여러 개의 정치체로 쪼개지자 그동안 삐걱거리며 유지되었던 관료제는 자연스레 붕괴되는 수순을 맞이했다. 

 

 늘상 지중해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동하던 세금과 식량은 뚝 그쳤고, 가장 많은 세금이 쓰이던 군대는 직격타를 맞았다. 새로운 야만인 지도자들은 따라서 그들의 새로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 대신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렇게 제국의 오랜 전통인 (한 번 뿌리 뽑히면 다시 도입하기 힘든) 세금 제도가 서유럽에선 서서히 사라져갔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5)

 

 실로, 새로운 야만인 통치자들은 세금 대신 토지를 선호했다. 토지 기반의 완전히 새로운 경제 체제, 이것이야말로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귀족이 지극히 부유했던 것과 달리, 중세의 영주들은 다소간 질박한 생활을 했다는 하나의 고정관념이 있다. 이 고정관념은 대체로 사실이다. 위대한 영웅들을 숭배하는 야만전사들에게 주기적인 세금이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가 아프면 비겁하고 역겨운 세금 장부를 불태우는 의식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려고 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6)

 

4. 그렇게 귀족들은 실제로 중세에 들어 가난해졌다. 

 

 지역과 도시간 상업망이 쇠퇴했고, 사치품들은 훨씬 희귀해졌다. 많은 도시들과 시골의 장원들이 버려졌다. 지역 단위의 수공업 커뮤니티는 맥이 끊겼다.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고전 문학작품들이 사라졌다. 알음알음 세대를 거듭하여 전해져 내려오던 인류의 수많은 암묵지들이 영원히 역사의 망각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옛 제국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7)
 

 

5. 새로운 종교, 기독교는 확실히 제국의 유산을 다음 세대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에 대한 가장 역동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역사학자, '투르의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시다. 그는 갈리아 속주의 원로원 조상을 둔 갈로 로망 계열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야만인 지도자들에게 평생을 충성했다. 그와 같은 당대의 주교들은 유의미한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도시와 왕국들 사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주교들은 심지어 가장 잔혹하고도 악명높은 군사 지도자들에 맞서서 대놓고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도 있었다.

 

 

로마 제국이 중세에 남긴 흔적 (8)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경청하는 국회의원들

 

 

 6. 로마의 공공성도 다소간 야만적 요소들로 인해 비틀렸음에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나가고있는 '의회'가 바로 야만인들에 의해 새롭게 도입된 대표적인 요소다. 북방 자유민들의 정치적 공동체는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형태의 의회를 형성해 그들의 사법적, 정치적, 왕권적 정의를 정당화했다. 국왕은 국가의 중대사를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의논해야했고, 또한 중대한 사법적 판결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끝.)

 

 

 

참고문헌:

Reynolds, Susan. Fiefs and vassals: the medieval evidence reinterpreted. OUP Oxford, 1994.

Fried, Johannes.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Wickham, Chris.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6.

세부적인 내용은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시리즈나 Cambridge Medieval Textbooks 시리즈의 책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 무명의덕질 2025.07.2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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