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서론

 

미갤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서 번역이 아닌, 한가지 칼럼 글로 인사를 드립니다. 최근 저는 게네시오스 연대기 첫번째 1권의 내용을 번역했고, 현재는 2권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이 연대기를 집필하던 도중, 문득 독자분들께 9세기 동로마 제국사의 뒷배경에 대한 이해를 어느정도 심어드리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 글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저의 로마사 수업을 담당하신 교수님과 동로마 제국에 관한 견해를 나눴던 적이 있는데, 그 교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보통 3시기로 나뉘고,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분은 로마사 전공이시며, 주된 연구 분야는 로마 제국 동부의 경제 및 무역 시스템입니다)

 

동서분할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395년 ~ 602년)

이클리오스 왕조 ~ 두카스 왕조 (610년 ~ 1081년)

콤니노스 왕조 ~ 팔레올로고스 왕조 (1081년 ~ 1453년)

 

그 교수님께선 이 3시기 중, 이라클리오스가 포카스를 몰아내고 즉위한 602년부터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는 1081년 4월 1일까지의 역사를 동로마 제국 중기로 보셨습니다. 이 동로마 제국 중기 역사를 전반적으로 전반적으로 이해하려면, 9세기의 역사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기 동로마의 시스템이 바로 이 시기에 정립되었고, 셀주크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위기에 몰리는 그 순간까지 그것이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글은 제가 앞으로 올릴 번역글의 이해를 돕기 위함도 있지만, 동로마 제국 중기의 전반적인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작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9세기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 활약했던 아르메니아 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해볼까 합니다. 그래서 글의 부제를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로 정했구요. 물론 제가 아직 대학원에서 동로마 제국사를 전문적으로 전공한 대학원생이 아닌, 고대역사와 고고학을 배우는 평범한 학부생 나부랭이에 불과하긴 하지만, 제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글을 준비했으니 아무쪼록 어여쁜 마음으로 잘 봐주시고,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슬람의 진공, 위기의 동로마 제국

 

서기 636년, 야르무크 전투의 패배 이후로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진격을 제어할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의 속주들이 이슬람의 물결에 의해 차례대로 쓸려나갔습니다. 8세기가 시작될 무렵엔, 제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은 발칸반도와 이탈리아의 일부분,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그리고 아나톨리아에 불과했습니다. 이뿐인가요? 무슬림들은 그 남아있는 영토마저 유린하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와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까지 진격해왔죠.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통치하던 6세기에 비하면, 정말 처참할 정도로 몰락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가존망의 위기를 타개한 걸출한 2명의 황제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레온 3세와 콘스탄티노스 5세 부자입니다. 레온 3세가 자신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존망의 기로에 놓인 동로마 제국을 구해냈다면, 콘스탄티노스 5세는 동로마 제국이 장기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황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콘스탄티노스 5세에 대해 짧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image.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콘스탄티노스 5세 통치기 (741년~775년) 제국 강역

 

이사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레온 3세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중요한 두차례의 승리를 (제 4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및 아크로이논 전투) 거두며 제국의 급한 불을 껐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제위에 오를 무렵, 제국은 영토의 축소와 740년 경부터 시작된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해 국력의 기반이 될 인구는 날로 급감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이 큰 타격을 입었고, 무엇보다도 국방을 책임질 군인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죠. 때문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재위기간 내내 인구 확충에 엄청난 신경을 기울입니다. 저는 7~8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는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누스 문디 6247년. (755년 9월 1일 ~ 756년 8월 31일)

아라비아의 칼리프 압둘라스 알리 제 21년.

로마 교황 바오로 1세 제 7년

 

헬리오폴리스의 주교 니케타스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에서 데려온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인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이로 인해 제국에 파울리키아 이단이 퍼지게 되었다. 역병으로 인해 인구가 줄어든 수도도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남부 그리스와 여러 섬의 가구들을 수도로 이주시켰다.

 

같은 해,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요새를 건축하였다는 사실을 빌미로 불가리아 인들이 조공을 요구해왔다. 황제가 사절을 푸대접하고 돌려보내자,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일으켰다. 불가리아 인들은 파괴를 일삼고,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 본국으로 무탈히 귀환하였다.

 

- 테오파네스의 연대기 中 -

 

 

 

여기서 제가 주목한 구절은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멜리테네에서 데려온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인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바로 이 구절이였습니다. 이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제국의 만성적 인구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타 지역을 토벌하고 그곳의 주민들을 제국으로 이주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다른 8세기 동로마 황제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전쟁을 치뤘는데요, 그는 주로 특정 지역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고 그곳을 약탈한 후, 주민들을 제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서 제국의 인구를 확충하는데 주력합니다. 그 주된 대상들은 아르메니아인, 슬라브인, 그리고 불가리아 인들이었구요. 아무튼 아르메니아 인들이 대대적으로 동로마 제국으로 이주하면서, 제국의 정계에 아르메니아계 성씨를 가진 귀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ex. 바르다스, 바르다니오스, 아르샤베르, 나르세스 등등) 사실 과거에도 아르메니아 인들의 대두는 존재했습니다. 당장 이라클리오스 역시 아르메니아 출신의 황제였죠.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본격적인 변화의 현상은 이 시기, 콘스탄티노스 5세의 통치기부터 시작됩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동로마 정계 진출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레온 4세가 바실레오스로 즉위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핵을 앓고 있었기에 정상적인 통치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제국의 실권은 그의 아내인 이리니가 쥐게 됩니다. 그녀는 레온 4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했고, 이후 콘스탄티노스 6세를 축출하고 본인이 단독 황제로 오릅니다. 그리고 이 이리니의 치세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의 활동이 한층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특히 동로마 제국의 국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후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이 동로마 제국의 군부를 장악하면서, 황제 vs 아르메니아 군벌간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9세기 뿐만 아니라, 10~11세기 마케도니아 왕조가 최전성기를 달리는 그 시기까지도 계속 이어집니다.

 

8세기 말~9세기 초 동로마 제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아르메니아계 귀족은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이 시기동안 큰 성공을 거둔 아르메니아인 중 한명으로, 로마제국 최초이자, 최후의 여제인 이리니의 발탁을 받아 출세한 자였습니다. 그는 이리니를 폐위시킨 니케포로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당하고 별다른 기록없이 역사 속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진 미스테리한 인물이죠. 우리는 이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에 대해 조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누스 문디 6291년 (798년 9월 1일 ~ 799년 8월 31일)

 

부활절 두번째 날, 이리니는 네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네명의 장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도성당을 떠났다. 그 네명의 장군들은 다음과 같다: 트라케시아 테마의 바르다니오스 장군, 트라키아 테마의 시시니오스 장군, 친위대 사령관 니케타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보일라스였다. 그는 이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 테오파네스의 연대기 中 -

 

 

 

제가 테오파네스 연대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바르다니오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바로 이 기사였습니다. '부활절 두번째 날' 이라는 키워드에 의거해 이 기사의 시간적 연대를 유추했을때, 799년 3월 말~4월 경임에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절을 통해 이 시기의 바르다니오스가 이미 트라케시아 테마의 총독이였으며, 여제 이리니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즉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는 최측근임을 알 수 있죠. 이리니 여제가 실질적으로 제국의 실권을 거머쥐는 시기는 레온 4세가 사망하는 780년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정황상 바르다니오스는 780년 ~ 799년 사이의 기간동안 여제에 의해 트라케시아 테마의 총독으로 부임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리니 여제가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아르메니아 인들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 755년 이래, 불과 2~30년 만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802년 경, 니케포로스가 이리니 여제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합니다.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권이 한번 교체되면 인사개혁이 종종 단행되기 마련인데, 이 바르다니오스는 이리니 여제의 최측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니케포로스 황제의 치세 하에서 여전히 강대한 위세를 떨치며 더욱 중용되는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명한 비잔틴 학자인 J.B.베리 교수는 자신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유능한 장군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를 등용하여,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 및 기타 3개의 아시아 테마를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바르다니오스의 등용은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바르다니오스는 두각을 나타내었고,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어 병사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니케포로스 황제는 단순히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의 재능만을 보고 그를 기용한 것은 아닙니다. 병사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 그러니까 군부의 핵심 인물인 바르다니오스와 손을 잡음으로서 군부 세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흡수하기 위한 계산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리니~니케포로스 1세의 시기를 거치며 아르메니아 인들의 세력은 동로마 정계의 한 축을 담당하며, 황제권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발언권을 갖게 됩니다. 이는 동로마 제국 특유의 정치체계 때문이었는데요, 군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 후보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듯, 이사우리아 왕조의 치세를 거치며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이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그 인사들 중 한명이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였구요. 그렇기 때문에 니케포로스는 하루빨리 아르메니아계 인사들과 손을 잡음으로서 자신의 집권을 도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를 등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9년의 짧은 통치동안 아르메니아 인들로부터 두차례의 제위 도전장을 (앞서 언급한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의 반란, 아르샤베르의 반란)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 인들의 입김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레온 5세 '아르메니아인' (813년 ~ 820년)

 

 

image.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레온 5세

 

 

803년,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는 자신의 막강한 권세와 기반을 바탕으로 니케포로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합니다. 그는 결국 프로테 섬으로 유배당한 뒤, 그곳에서 실명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 이후 군부의 중핵으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레온이라는 한 아르메니아 사내입니다. 게네시오스에 의하면, 그는 아시리아인의 피가 섞인 혼혈 아르메니아인으로,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 실각 이후, 니케포로스 - 스타우라키오스 - 미하일 랑가베스 3대에 걸친 치세동안 군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입니다.

 

 

바르다니오스의 반란이 한창일 무렵, 레온은 자신의 옛 주인 바르다니오스를 배신하고 황제군 측에 투항하였고, 아모리움의 미하일이 그 뒤를 따랐다. 니케포로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레온을 용병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미하일은 코르테 섬의 태수로 봉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한사람, 토마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르다니오스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전한다. (803년)

 

-게네시오스의 연대기 中-

 

 

그렇다면 니케포로스 왕조의 황제들은 어째서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군부에 중용한 것일까요? 이 레온이라는 사내는 인물로, 이 사람 역시 아르메니아계 인사이자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의 측근 중 한명이었습니다. 니케포로스 왕가 입장에서 이 사내를 기용하기엔, 상당히 꺼림칙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레온을 기용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이 당시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을 단기간에 뿌리뽑기에는 너무 멀리와버렸던 것이 큽니다. 때문에 니케포로스 왕가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군부의 아르메니아계 인사가 보이면, 그 자를 숙청하고 다른 아르메니아 인사를 기용하는 방식으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 레온 역시 그 전철을 그대로 밟은 자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바르다니오스 투르코스를 배신하고 니케포로스에게 투항함으로서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니케포로스 사후, 미하일 랑가베스의 치세에는 아나톨리아의 총독, 즉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됨으로서 자신의 옛 주인의 직위를 그대로 계승하였죠. 그러나 레온은 바르다니오스와 달리, 니케포로스 왕가로부터 제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합니다. 813년, 레온이 미하일 1세를 폐위시키고 군부의 추대를 받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곧 레온 5세였습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이리니~니케포로스의 치세동안 군부에서 힘을 키워온 아르메니아인들의 결실이 맺어지는 순간이였던 것입니다.

 

 

테오필로스 (829년 ~ 842년)

 

 

image.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테오필로스 (그림 정중앙, 칼을 차고 권좌에 앉아 있는 사람)

 

 

아르메니아인 황제 레온 5세는 7년간 제국을 다스렸고, 그의 뒤를 이어 미하일 2세가 즉위함으로서 아모리아 왕조가 시작됩니다. 이 아모리아 왕조의 황제들은 과거 니케포로스 왕조의 사례를 거울삼아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된 군부를 과거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로 상대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테오필로스와 미하일 3세의 치세에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이로인해 829~867년 사이에 등장하는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의 이름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저는 바야돌리드 대학의 후안 시녜스 코도네르 교수의 저작, 'The Emperor of Theophilos and the East'를 토대로, 829년부터 867년 사이에 활약한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을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름

생몰년도

행적 (가족사항 직위 순으로)

Theodora_in_the_Madrid_Skylitzes (1).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테오도라

815 ~ 867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의 친여동생, 미하일 3세의 어머니,

아우구스타 (테오필로스의 아내)

The_murder_of_the_Caesar_Bardas (1).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바르다스

? ~ 867

테오도라의 친오빠, 페트로나스의 친형, 미하일 3세의 외삼촌,

카이사르

Petronas_with_John_the_monk (1).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페트로나스

? ~ 865

테오도라의 친오빠, 바르다스의 친동생, 미하일 3세의 외삼촌,

드룬가리오스

John_the_Grammarian_as_ambassado.jp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문법학자' 요안니스

불명

테오필로스의 어릴 적 스승, 테오필로스의 자식들의 대부,

제 83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르메니아인' 마누일

불명

테오도라 3남매의 삼촌,

아르메니아 혹은 아나톨리콘 테마의 총독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

불명

가족사항 불명, 마니아케스 家의 시조 추정,

드룬가리오스

콘스탄티노스 바부치코스

불명

테오도라의 매제, 드룬가리오스,

838년 아모리온 공성전을 지휘함 (아모리움 42명의 순교자)

테오도시오스 바부치코스

불명

콘스탄티노스 바부치코스의 형제,

외교관? 추정

 

 

 

눈치가 좋은 신분들은 아마 알아차리셨을수도 있을텐데요, 테오도라를 제외한 이 7명들의 인물 중, 무려 4명이 테오도라 황후와 가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는 테오도라의 친오빠였고, 테오포보스와 함께 테오필로스를 보좌하며 제국의 국방을 책임진 '아르메니아인' 마누일은 테오도라의 삼촌, 그리고 838년 다지몬 전투의 패전 이후 이슬람 군의 침략을 맞아 아모리움에서 맞서싸운 콘스탄티노스 바부치코스는 테오도라의 여동생 소피아의 남편이었습니다. 이것은 테오필로스 황제가 아르메니아 군벌을 견제하고 위협이 될만한 인물을 숙청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닌, 이들과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의 친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함으로서 정치적 파트너 삼아 국정을 운영했음을 뜻합니다. 과연 이러한 방법은 동로마 제국의 정치체계에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842년, 테오필로스가 갓 2살먹은 미하일 3세를 두고 이질로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위는 미하일 3세에게 정상적으로 승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하일 3세의 어머니 테오도라를 중심으로 한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이 뒤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미하일 3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자칫 제위계승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테오필로스의 혼인등용 정책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었죠.

 

 

아르메니아 군벌의 외척화 (855년 ~ 866년)

 

842년, 미하일 3세가 갓 2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기에, 테오도라 황후가 미하일 3세의 섭정자로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군부에는 더이상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가진 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린 황제를 두고 실권을 잡고자 하는 아르메니아 군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테오필로스의 정책은 미하일 3세를 군부의 야심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지만, 이로인해 군부의 외척화가 진행되었고, 그 외척들 간의 갈등과 내부총질은 막지 못한 것이었죠. 이 야심가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테오도라 황후의 큰오빠, 바르다스였습니다. 바르다스는 성장해가며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미하일 3세와 결탁하여, 테오도라 황후의 오른팔 테옥티스토스를 살해하고, 황후를 수도원으로 유배시켰습니다. 그는 미하일 3세를 단독 황제로 올리고, 본인은 조카의 등 뒤에서 실권을 휘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다스는 대단히 유능했던 인물이였는데, 그의 업적은 대표적으로 3가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첫째, 그의 치세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을 압도했습니다. 둘째, 바르다스는 대학을 설립하고, 전국의 명사들을 초빙하고 강연을 시행함으로서 제국의 소프트파워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셋째, 불가리아를 정교회에 편입시킴으로서 발칸 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다스의 정치적 기반은 상당히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카이사르로서 실권을 휘두를 수 있는 뒷배경에는, 조카 미하일 3세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황제의 지지가 없다면, 그의 위치는 여동생 테오도라 황후가 밟은 전철을 그대로 밟으며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image.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칼을 맞고 죽임을 당하는 바르다스 (그림 중앙),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미하일 3세 (우측)

 

 

시간이 흐를수록 바르다스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미하일 3세의 총애를, 자신이 아닌 다른 아르메니아 인이 독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총애를 받는 자가 바로 유명한 마케도니아 왕조의 태조, 바실리오스였습니다.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와 함께 바르다스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이로인해 말년의 바르다스는 자신의 실각에 대한 상당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고민은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네시오스의 연대기는 바르다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미하일과 바르다스는 직접 전군을 지휘하여 수륙양면으로 크레타 섬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군대가 케포이에 다다랐을 때, 카이사르 바르다스를 제거할 음모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이 음모는 하느님께서 직접 정한 것으로, 황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바르다스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군대가 출진하기 하루 전날, 바르다스는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마지막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지인들과 술을 마신 뒤, 그들에게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할 것임을 밝혔다. 이후 그는 호데고이라는 이름의 수도원에 방문하였다. 그는 촛불을 켠 채로 수도원 입구에서 송별 찬송을 드리고 있었는데, 그의 망토가 갑자기 어깨에서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바르다스는 울먹이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앞으로 일어날 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 게네시오스의 연대기 中 -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비잔티움 연대기, 혹은 나무위키의 문서들을 보면 마치 바실리오스가 바르다스를 살해할 음모를 세우고, 미하일 3세가 이를 눈 감아주었다는 식의 뉘앙스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잘못된 인식입니다. 바르다스를 제거에 앞장선 사람은 미하일 3세, 바로 본인이었습니다. 사서에서도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의 계획에 공조했다라는 뉘앙스로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주도적으로 암살을 계획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하일 3세가 그를 제거할 심산이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를 제거하려 했느냐, 그 이유에 대해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테오필로스가 아르메니아 인들을 다루는 정책의 기조는 혼인, 그리고 등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척을 필연적으로 탄생시키며, 황제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미하일 3세는 유아기 시절 어머니의 섭정을, 청소년기 시절엔 바르다스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미하일 3세는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권력의 정점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어른들에게 직무를 맡겼지만, 그가 점차 성장하고 정치적 감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미하일 3세는 분명 바르다스의 힘을 제어하고자 했고, 자신의 뜻을 따라 바르다스를 제어할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인물이 바실리오스였던 것입니다. 이 바실리오스의 승진속도는 동로마 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857년 경에 처음 등장한 그는 단 9년만에 공동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죠. 이러한 승진은 단지 총애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미하일 3세가 그를 파격적으로 밀어주어 바르다스를 견제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카와 삼촌의 싸움은 삼촌이 조카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작 (867년)

 

 

image.png 9세기 동로마 제국에 관한 이해: \'아르메니아 인들의 시대\'

바실리오스 1세(좌측), 미하일 3세(우측)

 

 

바르다스를 제거한 미하일 3세는 외척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러나 이 바르다스의 죽음은 미하일 3세, 본인의 명을 재촉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동안 미하일 3세는 바실리오스를 통해 바르다스를 견제했지만, 그 바르다스가 사망하자 바실리오스를 견제할 수단 자체가 전무했던 것입니다. 바르다스 사후, 미하일과 바실리오스의 대립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바실리오스는 권력을 얻은 뒤, 그는 미하일 황제가 향락을 그만두게끔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는 그의 행위들이 자신을 향한 미하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하일은 자신의 일탈을 막는 바실리오스의 질책을 견디지 못했고,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어느 날 미하일은 황제의 놀잇배의 노를 젓는 바실리키노스라는 사내를 불렀고, 그에게 보라색 옷을 입히고 그의 머리에 제관을 씌웠다. 그러고 나서 미하일은 바실리키노스의 손을 잡고 원로원으로 데리고 갔고,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짐의 벗들이여, 짐은 바실리오스가 아닌 이 자를 명예로운 황제의 자리에 앉혔어야 했노라. 짐은 짐의 행동을 후회하노라; 바실리오스의 것은 이 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노라."

 

- 마드리드 스킬리치스 中 -

 

 

이 구절은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바실리오스가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게 살펴보면 이 구절은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의 정치적 대립을 상징하는 구절입니다. "그는 미하일 황제가 향락을 그만두게끔 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미하일은 자신의 일탈을 막는 바실리오스의 질책을 견디지 못했고..." 이 구절은 미하일과 바실리오스가 대립하였고, 미하일 3세는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르메니아계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아르메니아계 인사를 키운 그 결과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이죠. 오히려 아르메니아 인사들로부터 미하일 3세 본인을 지켜줄 안전장치를 본인이 스스로 떼어버린 셈이였습니다.

 

저명한 동로마 권위자 주디스 헤린 교수의 저서 'Women in Purple: Rulers of Medieval Byzantium'에 의하면, 미하일 3세는 그의 통치 말년에 자신의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와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보아, 미하일 3세가 바실리오스를 누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손을 잡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모자의 정도 존재했겠지만요) 그러나 시기가 너무 늦었던 듯 싶습니다. 바르다스가 살해당한 바로 다음 해인 867년,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의 불편한 동행은 결국 1년만에 끝장이 났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는 미하일 3세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 왕조를 열었습니다. 바야흐로 아르메니아 왕조 시대가 새로이 도래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사우리아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5세의 치세를 시작으로, 바실리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 왕조를 건국하는 시점까지, 100여년 간의 동로마 제국사를 다루며 아르메니아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계에 진출해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빠르게 동로마 제국의 군부를 장악한 이후, 황제 가문과의 연합을 도모했으며,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3단계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역대 동로마 황제들과 아르메니아계 인사들의 정치적 암투와 내전이 존재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의 역사를 보면, 군벌들이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노리는 상황이 자주 나옵니다. 라카페노스 가문과 콘스탄티노스 7세의 사례가 있고, 포카스/치미스케스 가문의 장성들이 로마노스 2세의 자식들이(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어리다는 빌미로 제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바실리오스 2세 역시 아르메니아 군벌들을 상대로 내전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벌어진 아르메니아계 인사들간의 정치싸움은 이 글에서 다룬 9세기 동안 벌어진 일들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9세기를 알아야 마케도니아 왕조 및 그 후대의 역사를 옳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독자분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펨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디터 업데이트+) GPT AI 기능을 포함하여 강력한 도구들을 사용해보세요 ⬆️ file 🍀플로버404 2024.04.16 412
공지 덕질 공통 이용규칙 및 안내 (업데이트중+ 2024-04-13) 😀컴덕824 2024.04.14 727
공지 K-POP 초보를 위한 필수 앱/사이트 목록 file 😀컴덕871 2024.04.14 363
공지 1000P를 모으면 다이소 상품권 1000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file Private 2024.02.14 2614
737 성경에서 숨길 수 밖에 없었던 책들 / ft. 천국과 지옥 - 베드로 묵시록 file 😀익명077 2024.04.17 254
736 왜 '지옥'인가? 지옥에 숨겨진 상징과 의미 총정리! : 단테의 신곡 지옥편 2부 file 😀익명049 2024.04.16 349
735 아돌프 히틀러 (1889-1945)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북부에 😀익명596 2024.04.16 203
734 평범한 사람들이 왜 '끔찍한 죄' 저지를까 😀익명793 2024.04.16 192
733 악한 사회 속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익명184 2024.04.16 233
732 사유(思惟)하지 않는 것 😀익명081 2024.04.16 193
731 악의 평범성’ 그리고 사유하지 않는 기독교 😀익명948 2024.04.16 184
730 K-POP 초보를 위한 필수 앱/사이트 목록 file 😀컴덕871 2024.04.14 363
729 논어 - [위정17]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한다 file 😀익명358 2024.04.12 533
728 지적 수준이 높을 수록 친구가 적은 이유 5가지 😀익명067 2024.04.12 180
727 니체 어록 😀익명229 2024.04.12 193
726 니체의 말 - 성공하는 사람들의 3가지 공통점 😀익명568 2024.04.06 322
725 아인슈타인 - 인생을 바꾸는 명언 😀익명913 2024.04.06 270
724 쇼펜하우어의 인생조언 - 혼자 되는 법을 배워라 😀익명280 2024.04.06 305
723 ** 세계 신학 논문 List ** 리스트는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익명835 2024.04.06 418
722 믿음의 증거를 만져볼 수 있는 이집트 교회를 가다 │이집트로 간 예수 1부 (4K) file 😀익명119 2024.04.05 246
721 황제, 교회 그리고 도마복음 (마지막편) | 신보다 권력을 택했던 교회 file 😀익명736 2024.03.27 378
720 왜 교회는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혐오하게 되었을까? | 예수님이 추구했던 ‘안드로포스(온전한 인간)’를 ... file 😀익명608 2024.03.27 348
719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된 개신교 교회의 칼뱅교회 😀익명511 2024.03.27 369
718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된 개신교 교회의 '칼뱅주의' | '예정론'과 &#0... file 😀익명665 2024.03.27 39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