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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삼단계설 (미적 실존 → 윤리적 실존 → 종교적 실존)

 

1) 미적 실존

찰나적인 향락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실존이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이나 쾌락을 추구하여 끊임없이 떠돌며 동요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삶은 결국 시름과 불안, 권태에 빠지게 된다. 이 단계에서 인생의 목적은 건강, 아름다움, 부, 명성, 지위, 재능, 미적 감각의 만족 같이 자기 인격 바깥에 있는 것들이다. 미적 실존의 이로니(Ironie)는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던 주체가 오히려 그 쾌락에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하여 마약을 하다가 결국 마약에 노예가 되어 삶 전체가 수렁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2) 윤리적 실존

미적 실존에서 절망에 부딪히게 된 주체는 이제 윤리적 실존으로 비약한다. 이전에는 자기가 즐겁고 좋은 것만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보편적인 윤리적 의무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킨다든지, 성실한 가장의 노릇을 한다든지, 자신의 입장에서 주어진 윤리적인 의무들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자아됨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이 실존 역시 결국 절망에 빠지고 만다. 인간은 마음 속 깊이에서 불성실할 뿐 아니라 윤리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자아됨을 이루어 보려고 애쓰면 쓸수록 더욱 더 내면적인 부담은 가중된다. 윤리적으로 주어진 과제와 불완전한 현실의 인간적 한계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간은 결국 체념하게 된다.

 

"사람은 성실하면 할수록, 양심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지운 과제의 엄청난 요구 앞에 스스로의 무력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그래야 할 자기에 비추어 윤리적으로 반성되는 지금의 자기는 언제나 그 반성에 견딜 수 없는, 참되지 못한, 의롭지 못한 자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면의 반성이 무한히 계속될 때 끊임없이 불안과 절망에 허덕이게 된다."

 

3) 종교적 실존

윤리적 실존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게 사는 삶이다. 유한한 인간은 결국 무(無)로 돌아갈 존재이기에 아무리 양심을 가지고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본다고 해도 소용이 없으며, 이러한 노력 자체에 후모르(Humor: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허탈감 속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역설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 자체에는 절망 뿐이지만 신이 그에게 희망을 부여해 준다는 역설을 믿는 것이다. 이로니(Ironie)가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경계이었듯이, 이 후모르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 사이의 경계를 이룬다. 각 실존의 절망적인 상황을 깨닫고 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다시 종교성 A와 종교성 B로 구분된다. 종교성 A는 인간의 내재적인 진리 인식 가능성에 바탕을 둔 종교 일반을, 종교성 B는 계시에 의거한 초월종교, 곧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리킨다. 종교적 실존이 현실화되는 것은 고뇌를 통해서이다. 고뇌(agony)는 종교적 실존의 특색이니,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무한한 초월자인 신에게 나아가 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신의 무한성에 비하여 보았을 때 인간은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고뇌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죄를 지었음을 안다." 종교적인 실존의 결정적인 지각(perception)은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하고 의로운 신 앞에서 단독자의 실존은 추악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책을 안고 전율한다. 죄는 신에 대하여 짓는 것이다. 자신의 죄됨에 대한 의식이 깊어지면서 "주체성은 비진리이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종교성 A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존재한다. 즉 주체성은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거룩함 앞에 설 때 단독자는 자신이 철저한 비(非)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하게 된다.

 

초월자의 힘이 없이는 사람은 결코 이러한 죄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에 종교성 일반과 그리스도교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 종교성 일반은 자신의 내부에 무엇인가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영원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죄됨"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초월자의 힘에 의하여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직시하게 되었을 때, 즉 단독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철저한 비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옳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실상은 거짓과 허위로 가득찬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영원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 그것은 오직 허위와 죄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 무한한 거리. 어떻게 이 양자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역설이 있다. 사람에게 영원한 진리와 복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자, 개별자로서 시간 안에 탄생하고 자라고 죽은 하나님을 사람의 이성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성은 이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이질적인 것·완전히 다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 역설과 충돌하며 거리끼고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를 넘어서서 이 모순(Absurde), 이 절대적인 역설을 받아들일 때에 신앙은 성립한다. 사람은 스스로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의 비약을 할 때에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모험이다. 그러나 "모험 없이는 신앙도 없다. 신앙이란 바로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과 객관적인 불확실성 사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다.

-키에르케고르 연구 (지성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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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자신 안에 심미적인 사람, 윤리적인 사람, 종교성 A의 사람,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모든 성향을 다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낸 것이다. 죠시아 톰슨이 다음과 같이잘 표현한 바와 같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익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상상과 감정을 분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이 써야만 한다고 느꼈다. 수년 동안 그려온 개념들과 공상들의 물줄기를 다 부어내야만한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의 익명의 저작들에서 발전되고 있는 삶의 영역들은 그가 자신 안에서 발견한 경향들에 대한 일종의 이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삶의 영역들'(spheres of life)이 키에르케고르가 친히 체험해 나간 삶의 단계들의 발전을 표현해 낸 것이라는 견해와 나의 입장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성향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심미적인 인간, 단순히 윤리적인 인간, 종교성 A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의 익명의 저자들이 보이고 있는 인생관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능한 방식들의 표현들이다. 그 삶의 방식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르디너(Gardiner)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각 관점의 입장에서 삶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익명의 저자들은, 마틴 떠스트(Martin Thust)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인형극의 인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과 익명의 저자들의 거리를 확언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익명의 저자들은 익명의 저자들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이 익명의 저자

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나의 사상은 아니다."

 

각기 다른 익명의 저작들은 각기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익명의 저자들은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것이다. 클라이츠(Crites)가 표현하고 있듯이 "각 작품은 각기 독특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클라이츠도 인정하듯이, 이들 작품들을 모두 감싸는 일종의 커다란 구조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커다란 구조는 그의 저작의 시초가 아니라, 마지막에서라야 드러나고 계시될 수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1846년까지 계속되는 초기 저작의 내용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이것이야 저것이냐}, {인생의 제 단계}, {공포와 전율}, {반복}, {불안의 개념}, {철학적 단편},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결정적 비과학적 후서} 등이 이 첫째 저작에 속한다.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이 초기 저작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의 나의 기여는 실존의 전 양상(the whole of the compass of existence)의 결정적인 특성들을 이제까지 그 어떤 작가의 작품들도 그렇게 하지 못한 변증법적 명료성과독창성을 가지고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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