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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관련 책 검색해보려고 오랜만에 도갤에 들렀습니다. 관련 검색어로 한참 넘기다 보니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번역본에 관련된 질문들이 몇 개 보이더군요. 제법 좋아하는 소설인지라 내심 반갑기도 해서 이 소설의 번역본에 대한 썰을 몇 자 풀고자 합니다.
일단 시중에서 구입 가능한 번역본은 모두 합쳐 세 가지입니다.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박형규 역,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김혜란 역, 열린책들에서 나온 홍대화 역이죠. 이외에 모 출판사에서 이 책의 새로운 번역본을 준비 중입니다. 얼마 전에 2차 교정이 끝났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그 번역본이 출간된다면 시중에 총 네 가지 판본이 풀리는 셈입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세 가지 번역본만 놓고 비교하도록 하죠.
1. 박형규, 『거장과 마르가리타』, 문예출판사
『거장과 마르가리타』 번역본 중 가장 먼저 출간되었던 번역본입니다. 1979년에 삼성출판사에서 \'악마와 마르가리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죠. 당시에는 한 권이었고, 그나마도 같은 책 안에 네크라소프의 「어느 해 여름」과 함께 수록된 형태...였죠. 원제와는 다른 제목으로 보나 분량으로 보나 아무래도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 및 편역한 원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확인해본 건 아니니 확실친 않습니다. 짐작일 뿐입니다) 이후 삼성출판사, 한길사 등을 거치며 『악마와 마르가리따』, 『거장과 마르가리따』 등의 다양한 제목으로 소개되었죠. 그래도 수요는 거의 없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알려지던 숨겨진 명작이었다고 그럽니다. 한길사 판본이 절판된 뒤에 한길사 측에 재출간 문의가 몇 번 들어오긴 했었다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어 번역본을 구할 길이 없어진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이었다고 하더군요.
여튼 그렇게 한참 묵혀 있다가 2006년에 이 원고가 재발간됩니다. 92~93년 절판 당시와는 다르게 2000년대 초반부터 환상문학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데다가 2005년에 러시아에서 제작된 10부작 TV미니시리즈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러시아에서 시청률 평균 50%를 넘기는 초대박을 쳤기 때문이죠. (이 드라마는 한국에도 DVD로 출시되었습니다.) 이에 몇 개 출판사에서 경합을 벌이다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이 된 거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출간된 책이지만, 정작 이 판본에 대한 평가 자체는 박한 편입니다. 일단 원고 자체가 오래 되었다 보니 번역 자체가 문제가 좀 있는 편이죠. 윤문을 많이 한 건지 읽히기야 매끄럽게 읽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뉘앙스로 번역된 문장이 더러 눈에 띕니다. 그외에 고유명사 번역에서도 좀 문제가 있고요.
하지만 이 판본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어떠한 주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불가코프는 이 소설에 정말 복잡하리만큼 당대 모스크바의 사회상을 얽어놓았습니다. 작중에서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불가코프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창조된 인물들이고, 작중에서 나오는 지명들도 대부분 실존하는 건물이나 조직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죠. 심지어 대사 조차도 개중에는 소설 자체만 놓고 보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석이 굉장히 절실한 소설인 셈인데, 이 판본에서는 그러한 주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념비적인 판본이긴 하지만 추천할 만한 책은 못되는 셈이죠.
2. 김혜란, 『거장과 마르가리타』,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된 번역본이고, 2008년 5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박형규 역보다 늦게 출간된 것 때문에 앞에서 나온 번역본과 TV미니시리즈의 영향이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대산문학재단에서 지원 도서로 선정한 게 2003년이었으니까요. 물론 드라마의 흥행이 출간을 앞당기게 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김혜란은 박형규나 홍대화에 비하면 번역자로서는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번역자이지만, 불가코프 번역에 관해서는 가장 믿을만한 번역자입니다. 세 사람 중 유일한 미하일 불가코프 전공자이고,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내기 전에도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을 두세 편 번역하여 출간했던 적이 있습니다. 김혜란 역의 문장은 박형규 역에 비해서는 다소 매끄럽지 않을지 몰라도, 막상 읽히는 거나 이해되는 정도는 박형규 역보다 훨씬 낫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본이 기존 박형규역보다 나은 점은 책의 뒤에 실린 방대한 주석입니다. 아주 면밀한 주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 그렇지만 정말 면밀한 주석을 붙이려면 아예 주석서가 따로 나와야 합니다. 러시아나 미국에서는 실제로 주석서가 나왔고요 - 작품 이해에 필수적인 주석은 어지간하면 다 있습니다. 게다가 작품의 무대가 된 모스크바 시의 지도를 첨부해놓은 유일한 판본입니다. 이래저래 가장 많이 권할만 하죠.
3. 홍대화, 『거장과 마르가리따』, 열린책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홍대화 역... 김혜란 역과는 같은 판본과 같은 주석서를 이용하여 번역했습니다만, 그 모양새가 좀 다릅니다. 주석의 종류도 다르고, 주석 달린 방식도 다르죠. 김혜란 역은 미주 처리했는데 홍대화 역은 각주 처리를 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관련 주석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죠. 물론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러시아문학 특유의 독자적인(?) 인명 표기는 좀 더 생각을 해야 할 부분이고...
4. 세 판본의 본문 비교
소설의 2장에 보면 예슈아 하-노츠리(예수 그리스도를 소설에서는 이렇게 부릅니다)를 본디오 빌라도가 심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설명하는 각 판본의 방식 차이가 좀 재밌죠.
박형규 역
"그럼," 총독이 말했다. "이 질문에 대답해봐라. 가리옷 사람 유다를 아느냐? 그와 얘기한 적이 있다면, 케사르에 대하여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있습니다." 죄수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저께 저녁 저는 성전 근처 가리옷 마을에서 온 유다라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인가?" 빌라도가 묘한 눈빛을 띄고 물었다.
"매우 선량하며,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죄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저의 사상에 커다란 관심을 나타냈으며 즐거이 저를 환영했습니다."
"촛불까지 켜고……." 빌라도가 이를 악문 채로 죄수에게 말했다. 그의 눈이 번득였다.
"예." 예슈아는 총독이 그토록 소상한 것까지 잘 알고 있는 데 놀라면서 말했다." 그는 저에게 정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단히 관심이 많더군요."
"그래서 너는 무슨 말을 했느냐?" 빌라도가 물었다.
"아니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어버렸다고 대답하려느냐?" 그러나 이미 빌라도의 목소리에는 체념한 듯한 기분이 나타났다.
김혜란 역
"그럼," 그가 말했다. "이 질문에 대답해봐라. 너는 키리아트에서 온 유다라는 자를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자에게, 그러니까 만일 말을 했다면, 카이사르에 대한 무슨 말인가를 했느냐?"
"그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죄수는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엊그제 저녁 성전 옆에서 키리아트 시에서 온 유다라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도시 남쪽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저를 초대하여 대접해주었습니다……."
"그자도 선량한 사람이었겠지?" 빌라도가 물었다. 그의 눈에 불꽃이 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무척 선량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죄수가 대답했다. "그는 제 생각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고, 매우 정성스럽게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작은 불꽃들도 켜두었고……." 빌라도는 거의 입을 벌리지 않고 죄수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두 눈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렇습니다." 예슈아는 총독이 그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다는 것에 다소 놀라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빌라도가 물었다. "아니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할 텐가?" 빌라도의 어조에는 이미 절망이 담겨 있었다.
홍대화 역
「그러니 대답해라.」 그는 말했다. 「너는 기리앗 출신의 유다38라는 자를 아느냐? 말한 적이 있다면, 네가 카이사르에 대해 한 말은 참으로 어떠한 것이냐?」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죄수는 기꺼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저께 저녁 나는 기리앗 출신의 유다라고 하는 한 젊은이를 성전 옆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도시 아래쪽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대접했지요…….」
「그는 선한 사람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악마 같은 불꽃이 튀었다.
「아주 선량하고 상냥한 사람이지요.」 죄수는 맞장구를 쳤다. 「그는 나의 생각에 큰 관심을 보이고, 나를 아주 정성스럽게 맞이했습니다…….」
「등불을 밝혔겠지…….」39 빌라도는 이를 악물고 죄수의 톤에 맞추어 말했다. 이때 그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렇습니다.」 총독이 그것을 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면서 예슈아가 말을 이었다. 「나에게 국가 권력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는 그 문제에 지극한 관심을 보였지요.」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느냐?」 빌라도가 물었다.
「혹은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이미 빌라도의 말투에는 기대감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유다와 예슈아의 저녁 식사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그 자리에 유다가 촛불(혹은 불꽃)을 켰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신통력(?)을 보입니다. 소설에서는 예슈아가 이 걸 어리둥절해하다가 넘어가버리는데, 물론 소설 내용만 보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죠. 따라서 박형규 역만 보면 넘기기 쉬운 장면인데, 김혜란과 홍대화의 번역본에 실린 주석을 보면 이 장면이 이해 가능합니다.
김혜란의 주석 :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의 율법은 누군가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유혹\'의 죄로 고소된 경우, 두 증인으로 하여금 벽 뒤에서 숨어 지켜보게 하고, 그 옆방에 피고인을 들어가게 하여, 피고인이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증인들이 그의 말을 듣게 했다. 그리고 이 때 피고인 곁에는 촛불 두 개를 켜두어, 증인들이 피고인의 얼굴을 분명히 알아보도록 했다.
홍대화의 주석 :
로마법에 따르면 숨겨 놓은 증인들이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밝히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 하에서 나온 대사였던 거죠. 물론 "작가가 이런 걸 다 의도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겠지만... 사실 그랬을 겁니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엄청난 자료수집가였고, 특히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구현해내기 위한 많은 자료를 참고했었죠. 소비에트 정권의 반종교 정책에 경악하여 종교 소설을 썼다는 인물이 참고 자료로 삼은 책들은 정작 기독교 전반에서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책들이었다는게 재밌는 부분이긴 한데...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저자 자신이 살았던 당대, 스탈린 정권 치하의 러시아에 대한 풍자 소설일 뿐만 아니라 성경, 중세 파우스트 전설 등 숱한 배경지식들이 녹아난 소설이기도 합니다. 결국 작품들이 품고 있는 맥락들을 집어내지 못한다면 작품의 가치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이야기죠. 여튼 이런 의미들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금방 떠올리기 어려운 부분이고, 주석이 그 역할을 담당해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실한 주석이 곁들여진 번역본들의 가치가 단연 높을 수밖에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