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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남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한 충만한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출애 33,18; 시편 26,8-9; 62,2-3; 요한 14,8; 1요한 3,2 참조).

 

 

  



서론: “너 자신을 알라 

 

  



    1.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류가 진리(veritas)를 추구하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이 투신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의식(conscientia)이라는 지평 안에서 펼쳐져 온 여정으로서, 인간이 실재와 세상을 알면 알수록 더욱 자신의 독특성을 깨닫게 되고, 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절박해지는 사물들과 그 존재의 의미를 묻게 되는 그런 여정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모두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델피(Delphi) 신전(神殿)의 문설주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는 권고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자, 곧 ‘자기 자신을 아는’ 존재자들에게는 최소한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기본 진리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고대 역사를 잠시 훑어보더라도, 세계의 여러 구석에서 상이한 문화 전통 속에서 인간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 질문들,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승살이가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들이 어떻게 동시에 솟아날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이스라엘(Israel)의 거룩한 책들, 「베다」(Veda)와 「아베스타」(Avesta),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저술들, 그리고 티르탄카라(Tirthankara)와 부처[佛陀]의 설교들 속에서 발견하고, 또 호메로스(Homeros)의 시와 에우리피데스(Euriphides)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에서는 물론,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정신을 언제나 압박해 온 의미 탐구(inquisitio de sensu)라는 공통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는 질문들입니다. 사실, 이 문제들에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사람들의 인생 항로를 결정짓게 됩니다.



    2. 교회도 이 발견의 역사에서 국외자가 아닙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인간 생명에 관한 궁극적 진리라는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복음 전파의 길을 달려 왔습니다. 인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봉사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리의 봉사(veritatis diaconia)라는 매우 특별한 책무를 자임하고 있습니다.1) 이 사명은 한편으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진리에 이르려는 인류의 투쟁의 동반자로 만들고,2)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공동체에 (비록 모든 도달된 진리가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와 더불어 나타나게 될 진리의 충만을 향한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선포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3. 남녀 인간들은 진리를 더욱 많이 알게 되어 그들의 삶이 더욱 인간다워지도록 만들 수 있는 일련의 원천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그 답을 모색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철학(philosophia)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철학이라는 용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amor sapientiae)’을 의미합니다. 인간 존재자가 사물들의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하여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을 때에 시작되어 자라난 철학은 진리를 향한 열망이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일부라는 것을 다른 모습과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물들이 왜 지금 있는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러나 차츰 드러나게 되는 그 답은 상이한 여러 인간 문화들이 얼마나 서로 상보적(相補的)인지를 밝혀 주는 지평 안에 설정되게 됩니다.
    서양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미친 철학의 강력한 영향력은 그것이 동양에서 발견되는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 방식들에도 미친 영향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각 민족은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혜의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정한 문화적 보물로서 진정 철학적인 형식들로 발전시킬 길을 모색하는 데로 기울게 됩니다. 그 한 가지 예는, 오늘날 사회 생활을 규제하는 데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법 체계들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는 요청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기본적인 철학적 지식의 형식입니다.



    4. 그럼에도, 하나의 용어가 다양한 의미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비적 명료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열망으로 추동되어 자기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여 자기 실현을 진전시킬 수 있게 해 주는 지식의 보편적 요소들을 취득하고자 추구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이 근본적 요소들은 창조에 대한 명상으로 그들 안에 일깨워진 경이(admiratio)로부터 솟아납니다. 곧 인간 존재자들은 그들 자신을, 모두 공동 운명을 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의 일부로서 발견하면서 경이를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서 늘 새로운 인식의 영역을 발견하도록 이끌 여정이 시작됩니다. 경이 없이는 남녀 인간들은 활기 없는 일상 속으로 매몰될 것이고, 차츰 진정한 인격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철학 작업을 통해서 인간 지성에 고유한 사변 능력은 종교적 사고 방식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주장들의 논리적 일관성과 그 내용의 유기체적 단일성을 통해서 진정한 사고 체계들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충분히 입증되는 것처럼, 이것은 간혹 하나의 단일 체계를 철학 전체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들은 자신의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관점을 모든 실재에 대한 완벽한 해석인 것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적 교만(superbia philosophica)’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모든 철학 체계(corpus)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마땅히 최대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유래되어 나오고 또 마땅히 그것에 충실하게 봉사해야 하는 철학적 탐구(cogitatio)의 우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시대가 변하고 지식이 증대되기는 했지만, 사상사 전체 안에서 철학적 통찰의 핵심을 분별해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모순율, 목적성과 원인성, 그리고 신, 진리, 선을 인식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자유롭고 영리한 주체로서의 인격 개념 등을 깊이 고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는 근본적인 도덕 규범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모두 상이한 학파들을 넘어 인류의 영적(정신적) 유산이라고 판단되어야 할 지식 체계가 실존한다는 몇 가지 지적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연히 어떤 함축적 철학(philosophia implicita)을 가지게 되어 그 결과로 우리가 모두 (비록 일반적이고 비성찰적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이 원리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정확히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두에게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상이한 철학 학파들에 대하여 일종의 척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단 이성이 보편적인 생명의 제일원리들을 성공적으로 직관하고 정형화시키고 그것들로부터 논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결론들을 끌어 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성(ratio recta)’ 또는 고대인들의 표현대로 ‘orthos logos’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5. 교회는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줄 목표에 도달하도록 추동하는 이성의 노력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철학 안에서 인간 생명에 관한 근본적 진리들을 알게 해 주는 길을 봅니다. 동시에 교회는 철학을,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데 필수불가결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선임자들의 유사한 노력을 계승하여 인간 이성의 이 특별한 활동에 관하여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특히 오늘날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자주 등한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근대 철학(philosophia moderna)은 분명 인간에 관하여 주의를 집중시킨 위대한 공로가 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부터 인간 이성은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하여 좀더 알고 싶은 열망과 더 깊이 알고 싶은 바람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복잡한 철학 체계들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다양한 지식 영역들에서 풍부한 결실들을 내고 문화와 역사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인간학, 논리학, 자연 과학, 역사, 언어학 등 모든 지식 세계는 이런저런 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취된 긍정적 결과들이, 인간 이성이 배타적으로 인간의 주체성 탐구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남녀 인간들이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초월하는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면 개개인들은 변덕에 내맡겨지게 되고, 인격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라는 것은, 기술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에 입각하여 본질적으로 실험적 소여들에 기초를 둔 실용적 척도들로써 판단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진리를 향한 인간의 정위(定位)를 표명하는 대신에, 너무도 많은 지식의 무게 때문에 시들게 되고, 조금씩 눈길을 높이 올려 존재의 진리(veritas existentiae)를 명상하는 데로 올릴 능력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근대 철학은 존재에 관한 탐구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인간의 인식 활동에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인간의 진리를 인식할 능력을 활용하는 대신에, 근대 철학은 이 능력이 제한되고 제약되는 조건들을 강조하기를 더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 탐구를,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회의주의(scepticismus)의 수렁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 여러 형태의 불가지론(agnosticismus)과 상대주의(relativismus)를 초래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오래도록 확실하다고 믿어져 온 진리들마저도 평가 절하하려는 경향을 가진 여러 사상 조류들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입장들의 정당한 다원성이, 모든 입장이 다 똑같이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는 무차별적인 다원주의(pluralismus)에 양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증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동양에 기원을 둔 특정 생명관들조차도, 진리의 배타적 특성을 부정하고 진리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다양한 가르침들 안에서 동등하게 드러난다고 가정하는 데에서 이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그저 견해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환원되고, 그저 망망 대해를 표류한다는 감각이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철학적 사고가 인간 생명의 실재와 그 표현 형식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또한 동시에 인격적 실존, 존재, 그리고 신에 관련된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 물음을 던질 줄 모르는 실존적, 해석학적, 또는 언어 철학적 주제들을 추적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남녀 인간들 가운데서도 인간 존재자의 위대한 인식 능력에 대한 불신의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위장된 겸손으로 단편적이고 잠정적인 진리들로 만족한 채, 더 이상 인간적이고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실존의 의미와 그 궁극적 기초에 관하여 묻지 않고 있습니다. 요컨대 철학이 이런 질문들에 관한 결정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위축되고 있습니다.



    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담지자로서의 자신의 전문성을 확신하고서, 진리에 대하여 성찰할 필요를 재확인하는 바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진리를 밝히 드러낼”(2고린 4,2) 사명을 함께 지고 있는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과, 진리의 다양한 측면들을 탐구할 의무를 지고 있는 신학자와 철학자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서한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에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을 제공함으로써,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확실한 길을 따라 걷는 가운데 그 수고에 대한 휴식과 정신적인 보람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주교들이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가톨릭 진리의 증인”이라는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강조 때문에, 이 과제를 짊어지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우리 주교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직무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 과제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물론, 철학이 그 고유의 충만한 품위를 복원·발전시키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성찰들을 쓴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현대의 여러 여건들 속에서 왜곡되거나 부정될 위험에 처해 있는 가톨릭 교리의 기본 진리들”에 대해4)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습니다. 이번 회칙에서는 진리 자체라는 주제와, 신앙과의 관련 속에 있는 그 기초에 관하여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복잡한 현대가 특히 미래를 걸머질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정당하게 참조할 기준점이 없다는 느낌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초의 필요는, 일시적인 것들이 가치 있다고 주장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의문에 처해지게 되는, 명백한 전망의 부재에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때에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비틀거리며 심연의 끝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자신들의 사고에 문화적 표현을 주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진리를 찾지 않고, 무엇이 과연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지를 인내롭게 묻는 수고 대신에 빠른 성공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합니다. 철학은 진리 탐구에의 끊임없는 호소와 더불어 사상과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본연의 소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이 주제에 관한 성찰들을 보낼 필요와 의무를 느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 시대가 열린 이래 세 번째 맞는 천년기(tertium millennium)의 새벽에 인류가, 그에게 맡겨진 위대한 천품들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가지게 되고, 또 새로운 용기를 내어 그 역사가 일부를 이루는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데 투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1장 하느님 지혜의 계시



    예수님: 아버지의 계시자



    7.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특징짓는 것은, 교회 자신이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소식의 담지자(2고린 4,1-2 참조)라는 뚜렷한 자각입니다. 교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지식은 교회 자신에 대한 명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1데살 2,13 참조). 우리의 신앙 생활의 시원에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독특한 만남이 있습니다(1고린 2,7; 로마 16,25-26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에페 1,9 참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5) 이 은혜로운 자발성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남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여 갑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라십니다. 인간 존재자가 하느님께 관하여 가지게 되는 지식은 인간 정신이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줍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Dei Verbum)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의 가르침을 거의 글자 그대로 따르면서, 또 트리엔트 공의회가 확정한 원리들을 설명하면서, 신앙 이해(intellectus fidei)의 오랜 역사의 여정을 따라 계시를 성서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전통에 비추어 성찰하고 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하느님 계시의 초자연적 특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합리주의자들은 널리 퍼져 있던 그릇된 주장들을 토대로 신앙을 공격하고, 이성의 자연적 역량의 결실이 아닌 다른 지식의 가능성을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의회가, 인간 이성에 고유한 지식을 넘어가는 신앙에만 고유한 지식이 있음을 힘있게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그럼에도 그 본성상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자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진리를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속이시지도 또 속이기를 원하시지도 않기 때문에 그 진리는 어느 진리보다도 더 확실합니다.6)



    9.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철학을 통해서 알게 된 진리와 계시 진리가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상호 배타적인 것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원천에서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서도 구별되는 두 가지 질서의 인식이 있습니다. 그 원천에서는,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아는 것이 다르고, 초자연적인 신앙을 통해서 아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서는, 자연적 이성이 취득할 수 있는 것들 외에도,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신비들이 있습니다.”7) 하느님 자신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초자연적 은총의 도움을 받고 있는 신앙의 인식은, 감각 지각과 경험에 의존하여 지성의 빛만으로 인식을 취득하는 철학적 인식과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인식입니다. 철학과 과학은 자연 이성의 질서 테두리 안에서 작업하지만, 성령께서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앙은 구원의 소식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고자 하신(1요한 5,9; 요한 5,31-32 참조) “은총과 진리의 충만”(요한 1,14 참조)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을 계시의 주체로 명상하는 가운데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계시의 구원적 성격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골로 1,15; 1디모 1,17 참조)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출애 33,11; 요한 15,14-15 참조),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참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 계시 경륜은 서로 긴밀히 결합된 행적과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은 가르침과 말씀들로 표현된 사실들을 드러내고 확인하며, 말씀들은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 줍니다. 이 계시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 구원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중개자이시며 동시에 모든 계시의 충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밝혀집니다.”8)



    11.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전해집니다. “때가 찼을 때”(갈라 4,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다음에, 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시간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9) 강력하게 재천명할 의무감을 느낍니다. 창조와 구원의 모든 위업이 빛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 사건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벌써 지금도 장차 올 시대의 충만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히브 1,2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맡겨 주신 당신 자신과 당신의 생명에 관한 진리는 시간과 역사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자렛 예수님의 신비 속에서 한 번이면서 결정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계시 헌장’은 이 점을 웅변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신 후, ‘마지막 이 시대에 와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 가운데 사시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려 주심으로(요한 1,1-18 참조) 모든 인간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인간들에게 파견되신 인간’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며’(요한 3,34),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신 분이십니다(요한 5,36; 17,4 참조). 그래서 그분을 보는 이는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현존과 출현으로,곧 말씀과 업적, 표징과 기적으로, 특별히 당신의 돌아가심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마침내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계시를 완수하시고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암흑에서 구원하시며 영원한 삶으로 부활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10)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역사는 성령의 끊임없는 활동으로(요한 16,13 참조) 계시 진리의 내용이 충만히 표현될 수 있도록 따라 걷는 여정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는 ‘계시 헌장’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 세기에 걸쳐 하느님 진리의 충만(완전한 이해)을 향하여 꾸준히 나아갑니다.”11)



    12. 그러므로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장(場)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아주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떠나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혼자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종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곧 영원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오고, 전체가 부분 속에 감춰지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얼굴을 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전해진 진리는 더 이상 어떤 특정 장소나 문화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인간 삶을 위한 절대적으로 타당한 의미의 원천이 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남녀 인간에게 제공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께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첫 번째 아담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신적인 생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12-15 참조). 이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삶과 역사의 목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가 남녀 인간들에게 제시되었습니다. ‘사목 헌장’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12) 그 밖의 다른 관점을 통해서는, 인격적 실존의 신비는 불가해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픔,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 죽음 등과 같은 극적인 물음들에 대해서는, 만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부터 흘러 나오는 빛 속에서가 아니라면 인간이 다른 어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비 앞의 이성



    13. 그럼에도 계시란 결국 신비(mysterium)를 간직한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을 계시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비밀스러운 사정들을 가르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13) 그러나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얼굴은 언제까지나 단편적이고 우리 이해 능력의 한계 때문에 위축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그 신비를 올바로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공의회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oboedientia fidei)’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14) 이 짧지만 함축성 있는 언명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란 하느님께 드리는 순종적인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그분의 신성, 초월성, 절대적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초월성을 지니시는 당신의 권위로써 당신께서 계시하시는 내용의 신빙성의 원천이시기도 함을 보증해 주십니다. 그리고 남녀 인간들은 신앙으로써 하느님의 이 증언에 동의(assensus)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진리를 보증하시는 분이 하느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계시되는 그 진리를 충만히 그리고 온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녀 인간들은, 그들에게 선물로서 주어지고 인격적 관계의 맥락 속에 설정되어 이성이 그것을 향해 개방적인 자세로 그 깊은 의미를 포용하도록 촉구하는 이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는 행위를, 그 사람 전체를 사로잡게 되는 근본적인 결단의 순간이라고 간주해 온 것입니다. 그 행위 속에서 지성과 의지는 그 영적 본성을 드러내고, 또 그 주체가 자신의 자유(libertas)를 충만하게 실현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15) 자유가 단지 신앙 행위의 일부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자유는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개개인이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자유는 하느님을 거슬러 내리는 결단들 속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기 실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바로 그 실재를 향해서 마음을 열기를 거부하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자유의 실행일 수 있겠습니까? 남녀 인간들은 신앙 행위보다 더 중요한 어떤 행동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진리의 확실성에 도달하고 그 진리 안에 살기로 결단 내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신앙 안에서입니다.
    인간 이성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도와 주고 있다는 표지(signum)들을 계시 자체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표지들은 진리 탐구를 새로운 깊이로 안내하고, 마음이 그 자발적인 탐구에서 이성 자신의 방법을 열정적으로 사용하여 신비 속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 표지들은 또한 이성이 그것들의 표지로서의 지위를 뛰어넘어 그것들이 담지하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도록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마음이 그것을 향해 이끌리고, 또 주어지는 바로 그 표지들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감추어진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계시의 성사적(sacramentalis) 성격, 특히 성체성사의 표지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표시하는 것과 표시되는 것 사이의 나뉠 수 없는 단일성이 그 신비의 깊이를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현존하시고 살아 계시며 당신의 영을 통하여 작용하고 계십니다. 성 토마스(St. Thomas de Aquino)는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질 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론 알 수 없고, 신덕만이 믿게 한다. 실물 아닌 표징들인, 빵과 술의 형상 안에, 놀랄 신비 감춰 있네.”16) 철학자 파스칼(B. Pascal)도 성 토마스를 반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분의 진리도 통속적인 사고 방식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또 역시 성체도 다른 통속적인 빵들과 같은 모습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17)
    요컨대, 신앙에 고유한 지식은 신비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신비를 더욱 드러내 줄 뿐입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셨습니다.”18) 그것은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에 참여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9)



    14. 제1차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또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도 참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계시는, 인간 실존의 신비를 깨우치는 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기준을 역사 속에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결코 다 깨칠 수 없고 다만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끝없이 소급해 올라갑니다. 이 두 개의 지점 사이에서 이성은 오직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앞에서만 한계를 인정하게 되는 자신의 고유한 탐구와 이해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인간의 마음을 중단 없이 노력하도록 분발시키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우리의 역사 안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이성이 끊임없이 자신의 인식 단계를 조금도 남김없이 최대한 발휘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확장하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더욱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실 풍부하고 중요한 정신들 가운데 하나, 곧 철학과 신학에 공통의 모범이 되는 성 안셀모(St. Anselmus)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그의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자주 그리고 집중적으로 명상하면서 저는 가끔 제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것이 제 생각을 완전히 벗어나, 결국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것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온통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제가 유용하게 얻을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그 생각을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문제는 더욱 강렬하게 저를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브의 보잘것없는 후예 가운데 하나인 제 비참한 모습을 굽어 살피소서! 저는 대체 무엇을 시작하였고 또 무엇을 성취했단 말입니까? 또 무엇을 목표로 삼았고, 얼마나 거기에 접근했단 말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했단 말입니까? …… 오 주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분이실 뿐만 아니라(non solum es quo maius cogitari nequit) 또한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크신 분이십니다(quiddam maius quam cogitari possit). …… 혹여 당신이 그러하지 않으셨더라면, 당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20)



    15. 나자렛 예수님께 기초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 계시 진리는 모든 남녀 인간이 자신들의 삶의 ‘신비’를 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로서 인간 존재자들에게 그 피조물로서의 자율성과 그들의 자유를 둘 다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초월적 세계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유와 진리 사이의 관계는 완벽하고, 그래서 우리는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주님의 말씀의 충만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계시는, 남녀 인간들이 정신의 내재주의적 습성(mens immanentistica)의 압박들과 기술 지배적 논리(logica technocratica)의 옹색함 한가운데서 길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사랑의 계획의 씨앗을 그 충만한 깊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공하신 궁극적 가능성입니다. 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개인적 관심사들을 넘어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정확히 그 진리의 길을 따라 그들 생명을 충만하고 조화롭게 소유할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신명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여기에 꼭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이 법은 너희로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이 본문은 거룩한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의 유명한 말 속에도 반향되어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 방황하지 말고,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진리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21)
    이 고찰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습니다. 곧 계시로써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진리는 인간 이성의 산물도 아니고 또 그것이 고안해 낸 어떤 논증의 귀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저 주어진 어떤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감을 일깨우며,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서 수용하려고 노력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계시된 진리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저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신 직관(Dei visionis)의 한 예표로서 역사 속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적 실존의 궁극적 목적은 분명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철학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방법과 내용이 다름에도 이 두 학문은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명상하는 충만하고 끝없는 기쁨으로 인도할 “생명의 길”(시편 15,11)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제2장 알기 위하여 믿는다 



    “지혜는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지혜 9,11)



    16. 성서는 신앙으로 얻어지는 지식과 이성으로써 얻어지는 지식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놀랄 만큼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지혜 문학(Libri sapientiales)’입니다. 이 성서적 본문들에서 놀라운 것은, 만일 그것들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게 된다면, 그것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구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문화와 문명들의 보화들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일부러 계획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목소리들이 다시 들려 오고, 고대 근동 세계 문화들의 공통된 특성들이 유례없이 풍부하고 깊은 통찰들을 담고 있는 이 본문들 속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성서 저자가 현자(賢者)를 묘사하면서 우연히 그를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따라 살고 그것을 옳게 새겨 깨우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 속으로 지혜의 길을 찾고 그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사냥꾼과도 같이 지혜를 뒤쫓고 지혜가 가는 길목을 지킨다. 그는 지혜의 창문을 엿보며 지혜의 문전에서 귀를 기울인다. 또 그는 지혜의 집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지혜의 벽에 말뚝을 박아 지혜 가까운 곳에 천막을 치고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산다. 그는 이렇게 지혜의 나뭇가지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자기 자녀들을 지혜의 보호 밑에 둔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의 그늘로 더위를 피하고 지혜의 영광 속에서 살아간다”(집회 14,20-27).
    이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영감 받은 저자에게 지식을 향한 열망은 모든 사람의 공통 특성입니다. 지성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지식의 “천 길 물 속”(잠언 20,5)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이집트의 현자들처럼 추상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그 현상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이 지식의 여러 종류들을 더욱 세분하고자 하는 근대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서의 세계는 인식 이론에 제 나름대로의 독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성서 본문의 특징은, 이성의 지식과 신앙의 지식 사이에는 분해될 수 없는 깊은 통일성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세계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포함해서 이성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관찰되고 분석되고 접근되어야 하는 실재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의 자율성을 철폐하기 위해서라든가 그 활동 영역을 제한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 존재자가 이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세계와 역사의 사건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결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내면의 눈을 날카롭게 해 주고 마음을 열어,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 적합한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느 길을 택할지를 알 수 있지만, 오직 신앙의 지평 안에서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그 목표에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신앙은, 남녀 인간들이 적절하게 자기 자신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위축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17. 이리하여 이성과 신앙을 어떤 식으로든 대립 구도로 몰고 가는 것은 근거 없는 일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상대방을 내포하고 있고, 각기 자기 고유의 활동 영역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잠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바로 이 방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일을 파헤치는 것은 임금의 영광이다”(25,2). 각기 다른 세계에서 하느님과 인간 존재자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물의 기원이 놓여 있고, 그분 안에서 모든 신비의 충만이 발견되며, 바로 이 점에 그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이성으로써 진리를 탐험할 과제가 주어지게 되고,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고상함이 성립됩니다.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때 이 모자이크 그림에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생각은 알아듣기 힘드오며, 헤아릴 길 없을 만큼 많사오이다. 세어 보자 하여도 모래보다 더욱 많고, 끝까지 닿는대도 도로 당신이오이다”(138,17-18). 알고 싶은 바람이 너무도 커서, 인간의 마음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경험에도, 이제껏 해답을 찾지 못한 모든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너머에 놓여 있는 무한한 풍요로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18.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역사적 반성을 통해서 이성에게 그 신비에 이르는 통로를 열어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성으로써 도달해 보려고 헛되이 추구하던 모든 것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더욱 깊은 형태의 지식에 바탕을 두어,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만일 이성이 그 자신에게 충분히 진실하다면, 마땅히 기본적인 특정 규칙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규칙은, 인간 인식이 끝을 모르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이성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그런 길이 모든 것이 개인적 정복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자의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부터 흘러 나오며, 세 번째 규칙은, 이성이 세상 통치 속에서 그분의 초월적 주권과 섭리적 사랑을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하느님 두려움(timor Dei)’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들을 포기할 때 인간 존재자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 어리석음이 바로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들에 시선을 맞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도 모르고(잠언 1,7 참조), 자기 자신이나 주변 세계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느님은 없다.”(시편 13,1 참조)고 주장할 때, 그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하며 또 사태의 충만한 진실, 그 기원, 그 운명 등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 지혜서는 이 주제를 좀더 밝혀 줄 수 있는 여러 중요한 본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자연 속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서, 자연 과학의 탐구는 철학적 탐구와 광범위하게 일치되고 있었습니다. 인간 존재자들이 자기 지성으로써, “(하느님께서) 세계의 구조와 구성 요소의 힘을 알게 해 주셨고, …… 해가 바뀌는 것과 별들의 자리를 알게 해 주셨고, 동물들의 성질과 야수들의 본능을 알게 해 주셨다.”(지혜 7,17.19-20)는 것, 곧 그가 철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성서 본문은 중요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맥락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그리스 철학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자연에 관해 추론하는 중에 인간 존재자가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이것은 인간 이성이라는 적절한 도구로써 읽게 될 때 창조주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할 수 있는 놀라운 ‘자연이라는 책(liber naturae)’을 신적 계시의 첫 무대로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지성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의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자유 의지와 죄악의 상태가 그 길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20. 이런 빛으로 바라보게 될 때, 이성은 조금도 과장 없이 제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추론의 결과들은 사실상 옳지만, 이 결과들은 더욱 넓은 신앙의 지평 속에 놓여질 때에야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주님께 달렸으니, 사람이 어찌 스스로 이루랴”(잠언 20,24). 구약성서에 따르면, 신앙은 이성이 알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얻게 하고, 그것을 모든 것이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사물들의 궁극적 질서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이성을 해방시킵니다. 요컨대, 인간 존재자들은 신앙으로 조명될 때, 모든 것과 특별히 자기 실존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성을 통하여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저자는 정당하게 하느님 두려워함을 지혜의 시작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잠언 1,7; 집회 1,14 참조).



    “지혜를 얻고 슬기를 깨쳐라”(잠언 4,5)



    21. 구약성서에 따르면, 지식은 단순히 인간 존재자, 세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앙과 계시 진리와의 불가결한 연관 관계까지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선민 이스라엘이 마주쳐야 했고 결단을 내려야 했던 도전들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의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성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과는 물론, 백성, 세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접합점(coniunctum)’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시를 통해서 그에게 다가온 신비에 대한 이 개방은 그에게는 결국 지혜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이성이 그 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열쇠인 것입니다.
    성서 저자에게, 진리 탐구의 과제는, 일단 이성의 한계들에 부딪히게 될 때 나타나는 긴장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컨대 잠언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데에서 오는 고생을 지적할 때에 발견하게 됩니다(30,1-6 참조). 그러나 아무리 많은 노력이 든다고 하더라도 신앙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아무리 의심의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안 가 본 데 없이 다 찾아 헤매는 ‘탐험가들’(전도 1,13 참조)로 만드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 추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찾아 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22.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장에서, 우리가 지혜 문학의 통찰들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철학적인 논거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면서, 깊은 진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곧 ‘마음의 눈(oculi mentis)’은 피조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매개로 삼아 하느님께서는 인간 이성 안에 당신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직관을 일깨우십니다(로마 1,20 참조). 이것은 인간 이성에게 그 자연적 한계를 거의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셈입니다. 이성은 감각 소여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에 감각적 지식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통해서 제공된 소여들을 분석하고 추론함으로써, 모든 지각적인 실재의 기원에 놓여 있는 원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이 중요한 본문이 인간에게 형이상학적 탐구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에 따르면, 이성이 어려움 없이 감각 소여들을 넘어 모든 사물의 기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창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남녀 인간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에서 감히 충만하고 절대적인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서는 불순종 때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이 창조주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는 위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자를 그 한가운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2,17)가 서 있는 에덴 동산으로 데려가셨다고 말할 때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이 상징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분별하고 결정할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부득이 상급 권위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교만(superbiae caecitas)이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자신들이 최고의 자율적인 존재자들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남녀 인간들은 모두, 인간 이성을 너무도 깊이 손상시켜서, 그 때 이후로는 충만한 진리 추구에 늘 심한 방해를 받게 되는 이 최초의 불순종의 포로들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진리 인식 능력은 진리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신 분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약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또한 인간의 사고가 죄악 때문에 얼마나 ‘공허한(vanae)’ 것이 되었고 인간의 추론이 얼마나 일그러져 거짓으로 기우는지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로마 1,21-22 참조). 마음의 눈은 더 이상 명료하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성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이성을 스스로 유폐시킨 족쇄로부터 풀고 그 허약함으로부터 구해 내신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2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철학에 대해서 한결같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신약성서,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오로 서한들에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huius mundi sapientia)’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 사이의 대립입니다. 계시된 지혜의 깊이가, 결코 저 진리를 충만하게 표현해 낼 수 없는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 습관의 틀을 깨부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서두에서는 이 갈등이 날카롭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아드님은, 순전히 인간적 논거에 입각하여 실존의 의미를 적절하게 설명해 보려는 마음의 모든 시도가 좌절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철학에 도전이 되는 진정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순수 인간적인 논리로 환원시키려는 온갖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사도는 힘주어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1고린 1,20) 지혜롭다는 사람의 지혜는 더 이상 하느님께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시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어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7-28). 인간적 지혜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 속에서 그 강함의 가능성을 바라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곧바로,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합니다.”(2고린 12,10)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이 생명과 사랑의 원천일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구원 계획의 신비를 계시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성이 ‘어리석다’고, ‘부끄럽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8)라는 역설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최고도로 압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된 사랑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철학자들이 하느님에 관해서 사색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급진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성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의 신비를 제거할 수 없지만, 그 십자가는 이성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의 지혜가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진리와 구원의 척도로 제시하고 있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제한하고자 하는 모든 문화적 한계를 철폐하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보편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에게 얼마나 커다란 도전입니까? 그리고 이성이 이 지혜에 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겠습니까? 철학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자가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 초월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도움을 받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stultitia Crucis)’이, 사실은 자기 자신들이 고안해 낸 어떤 체계의 모래톱에 좌초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진리를 소유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앙과 철학 사이의 연결 고리가 거기에 걸려 깨어질 수 있는 암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것들이 둘 다 진리의 끝없는 대양(大洋)으로 항해해 나가기 위한 전진 기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과 신앙 사이의 경계를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둘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도 보게 됩니다.




제3장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진리를 찾는 여정



    24. 사도행전에서 복음사가 루가는 사도 바오로가 선교 여행 중에 아테네에 갔던 일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철학자들의 도시는 여러 우상의 상들로 가득했습니다. 한 제단이 특별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는 이것을 복음 선포를 위한 공통의 기초를 다지기에 적합한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Ignoto Deo)’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사도 17,22-23). 이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6-27).
    사도는 교회가 언제나 소중히 여겨 온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마음 속 저 깊은 곳에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열망하는 불씨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성금요일’의 전례에서는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사실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람이 주님을 찾아 만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으니, 하느님을 안 믿는 이들이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거울삼아 주님 홀로 인류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하게 하소서.”22) 그러므로 인간 존재자가 취할 길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의 능력으로 시작하여 이 세상의 우연적인 것들을 넘어 무한을 동경하는 길입니다.
    남녀 인간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이 내밀한 열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문학, 음악, 그림, 조각, 건축, 그리고 그들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다른 작업들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탐구의 절박성을 선언하였습니다. 특별히 철학은 이 탐구를 자신의 고유 과제로 삼고, 독특한 수단과 학문적 방법들을 통해 이 보편적인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25. “모든 인간 존재자는 알기를 바랍니다.”23) 그리고 진리는 바로 이 열망의 고유 대상입니다. 일상 생활은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또한 단순한 견해들을 넘어 사물들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가운데서 인간은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그가 지각하는 것들의 참된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려 내는 문제에 결코 진정으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배격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면 그들은 만족과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나는 속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속임수에 걸려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24) 사람은 독자적으로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고 사물들의 객관적 진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출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특별히 과학적 영역에서 그토록 많은 물음과 탐구들을 낳았고, 최근의 세기들을 통해서 중요한 결실들을 내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진정한 진보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론적 영역의 탐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실천적 영역의 탐구입니다. 실천적 탐구(investigatio practica)란, 실행되어야 하는 선을 지향하는 진리 탐구를 의미합니다. 자유롭고 올바른 의지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데에서 인간 인격은 행복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고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도 역시 그것은 진리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확신을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자유 없이는 윤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 각 개인이 진리의 추구에서 자신의 길을 밟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에 앞서는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가진 더욱 중한 의무는 진리를 찾아야 하고, 나아가 한 번 알게 된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5)
    그러므로 각자의 생애에서 선택되고 추구된 가치들이 참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본질적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참된 가치들만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실현시킬 수 있고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들의 진리는 자기 자신 안에 움츠러듦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저 진리를 초월적 차원에서 포착하도록 자기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발견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고 성숙하고 책임 있는 인격자로 자라나는 것은 본질적인 인간 조건입니다.



    26. 진리는 인간에게 처음에는 물음으로써 다가옵니다. 인생이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얼핏 보면, 인간의 실존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관한 의문들을 가지기 위해서, 어리석은 내용들을 가르치는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거나, 욥기에서 발견되는 자극적인 질문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일상적인 고통의 경험과, 이성으로 풀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사실들의 배열만으로도, 의미 문제와 같이 극적인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에 넉넉합니다.26) 더욱이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첫 번째 진리는 우리 죽음의 불가피성입니다. 이 당혹스러운 문제가 일단 제기되게 되면, 그 충만한 대답을 추구하는 일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운명에 관한 진리를 알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 삶의 결정적인 끝인지, 아니면 그 너머에 어떤 다른 것이 있는지, 또는 내세(來世)라는 것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합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죽음이 철학에 결정적인 방향을 주었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고, 또 지금은 그로부터 2000년 이상이 흘렀다는 사실 역시 못지않게 결정적입니다. 죽음의 사실에 직면해서 철학자들이 거듭거듭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와 더불어 인생의 의미와 불멸성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7. 철학자이든 일반 대중이든 아무도 이 물음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선택하는 답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고, 이것은 결정적인 탐구의 순간인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진리라면, 비록 그것이 전체적 진리가 아닐지라도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만일 어떤 것이 참되다면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도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보편성을 넘어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탐구에 의미와 답을 줄 어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토대 역할을 할 궁극적인 어떤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질문에 종지부를 찍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최종적 설명,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설(hypothesis)들은 매혹적일 수 있지만,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허용하든지 허용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 각자에게는 궁극적이라고 인정된 어떤 진리에, 곧 더 이상의 의문이 가능하지 않은 그런 확신을 주는 진리에 개개인의 실존이 닻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여러 세기를 두고 철학자들은 이런 진리를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사상 체계들과 학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철학 체계들을 넘어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개인적인 확신과 경험들 안에서, 가족과 문화 전통 안에서, 또는 어떤 스승의 지도 아래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길에서, 자기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은 진리의 확실성과 그 절대적 가치의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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