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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기사
문제가 되는 신묘년조 기사의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내조하여 조공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 건너와
破百殘□□□羅 以爲臣民.
백제 □□□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주지하다시피 신묘년래 도□에서 결자를 海로 추측하는데 맥락상 海로 봐도 큰 문제는 없어보인다.
문제는 C인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결자가 세 개씩이나 생기는 바람에 해석을 두고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2. 일본의 해석
신묘년조 기사에 결자를 海로 가정하고 문장을 해석하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내조하여 조공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들어와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여기서 결자에 가야(임나)를 넣어 백제신라가야 모두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첫번째 결자를 東으로 봐서 백제를 먼저 깨뜨린 후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2_1. 일본 측 해석의 문제점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첫째는 과연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정복할 능력이 있었느냐 하는 현실적인 지적이고
또 하나는 신라와 대립하며 백제와는 원만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왜가 갑자기 우호국인 백제를 공격하는 게 비상식적이라는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과거 백제와 함께 신라를 협공하던 시절에도 신라 하나조차 멸망시키지 못한 야마토 왕권이 갑자기 단독으로 백제와 신라 모두를 복속시켰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문헌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을 해보면, 영락 원년에 왜가 백제나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지왕
〔8년(392)〕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4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
〔8년(392)〕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마립간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392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모두 영락 원년(391)년에 발생한 일임
신라와 백제 측 기록 모두 오직 고구려만 언급하고 있을 뿐 왜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일본 측 사료는 어떨까?
일본서기
(3년, =영락원년) 이 해 백제의 진지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日本)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菟木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왕에서는 진지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서도 백제나 신라에 군대를 파견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지만, 진지왕이 시해되고 아신왕이 등극하는 과정에서 야마토 왕권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
통상적인 일본서기의 서술논조를 고려할 때 왜왕이 책망하여 진지왕을 시해하여 사죄하였다는 것은 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진지왕에서 아신왕으로의 정권 교체가 쿠데타였다는 서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세 사료에서 보듯이 영락 원년에 백제와 신라가 왜의 침공을 받은 사실은 없으며 오히려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모종의 이유로 고구려에게서 압박감을 느끼고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데 이 또한 주목할 만하다.
3. 한국 학계의 입장
앞서 확인하였듯이 영락 원년 당시 왜의 백제 신라 침공은 사료상으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으며 오직 광개토대왕릉비에서만 등장한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계의 논의는 신묘년조 기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정인보 선생의 주어 생략설이다.
주어 생략설에 따르면 신묘년조 기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내조하여 조공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들어와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고구려가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만약 래도(來渡)의 주체가 왜가 아닌 고구려라면 이는 391년 당시 고구려의 관미성 점령을 통해 교차검증된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설명이지만 곧 강력한 비판에 직면했다.
4. 일본 학계의 반격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영락 원년 당시 이제 막 중앙집권국가로 내딛기 시작한 야마토 왕권이 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여 복속시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 야마토 왕권이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은 수용하면서도 신묘년조 기사의 주체가 야마토 왕권이라는 생각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학계는 전치문 구조설에 입각하여 주어생략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전치문 구조설을 지지하는 일본의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로, 문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도해파백잔의 주체를 고구려로 본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이다.
실제로, 주어생략설의 해석은 일반적인 한문 해석법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며, 도해파백잔의 주체는 고구려보다는 전술된 왜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두번째로,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오류이다.
신묘년조 기사에서 이미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백제를 또다시 정벌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
문장의 맥락상 신묘년조 기사는 영락 6년에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전쟁명분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락 원년에 이미 백제가 고구려에 정복되어 신민이 되었다면 영락 6년에 백제를 정벌하는 것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특히 이러한 비판은 광개토비의 전반적인 서술구조를 고려할 때 타당한 지적이었다.
광개토비는 먼저 전쟁 명분을 언급하며 전쟁을 정당화한 후 왕의 구체적인 정복활동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러한 문장구조를 고려하면 이미 복속된 백제를 침공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치문설 역시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었다.
신묘년조 기사를 보면 백제는 왜의 침공을 받은 피해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째서 가해자인 왜가 아니라 피해자인 백제가 정벌 대상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백제가 일본에게 복속했기 때문에 정벌의 대상이 된다면 같은 논리로 신라 또한 정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텐데, 신라는 고구려의 정벌을 받지 않았다.
만약 일본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신묘년조의 주체이자 전쟁 명분이 된 왜는 어떤 형태로든 언급이 되야 한다.
그러나 영락 6년의 기사는 오직 백제 왕을 언급할 뿐 다른 세력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 기사가 대전치문이라는 주장을 제시했다.
즉, 신묘년조 기사는 영락 6년에 한정된 전쟁 명분인 것이 아니라 영락 17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對南 정복활동 전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구의 사실로써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야마토 왕권은 일종의 트릭스터로 사용되어 실제보다 그 군사력이 과장되었으며, 백제 정벌로 시작하여 종국에는 왜의 토벌이라는 서사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그러나 대전치문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문제를 불러왔다.
패려 정벌, 영락 9년 정벌, 영락 20년 정벌은 모두 전치문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데 비해 신묘년조 기사만 특별하게 대전치문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만약 신묘년조 기사가 대전치문이라면 후술되는 숙신 정벌은 흐름상 맞지 않는다.
또한, 영락 10년의 정벌의 명분은 영락 9년에서 내물마립간이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대전치문으로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상이 신묘년조 논란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5. 결론
이제부터는 사견인데, 영락 원년의 기사가 전치문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신묘년조 기사의 주체가 왜가 맞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후술되는 영락 6년의 정벌 대상은 백제이므로 영락 6년의 정벌이 전치문에 의한 결과라면 신묘년조 기사의 주체는 백제가 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문제는, 결자로 인해 내용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묘년조 기사는 전치문으로 해석하는 게 합당하고, 주어인 고구려를 생략한 것이라는 건 다소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묘년조 기사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최연식 동국대 교수의 해석이 타당하다 여겨지는데, 최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A.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내조하여 조공하였다.
B. 而倭以辛卯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C. 來渡返破
반파에 들어왔고
D. 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는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또는(B와 연결시켜)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서) (백제의) 신민으로 삼았다.
이때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C에서 破를 동사가 아니라 명사로 보았다.
앞의 결자는 반(返)으로 판독하여 왜가 침입(來)한 대상이 백제가 아니라 반파국으로 해석했다.
이때, C와 연결시켜 D의 상황을 추측해 보자면, 백제와 왜가 신라와 반파국을 공격하기로 사전 합의가 되어 있었으며, 왜는 합의대로 신묘년에 반파국을 침공했다. 이에 따라 백제도 호응하여 신라를 단독 또는 합동으로 공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위에서 지적받았던 부자연스러운 해석 문제는 해결된다.
또한 일본 학계의 주장대로 신묘년조 기사가 전치문이 되어 자연스럽게 연결되므로 일본 학계의 주장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고구려가 왜의 군사력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는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 사학계의 주장처럼 고구려의 목적이 백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왜국의 군사력을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과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특히, 영락 6년의 정벌 대상이 왜가 아니라 백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또한, 왜가 신묘년에 침입한 대상이 백제가 아니라 반파라면 왜 동맹 관계였던 백제를 침공했느냐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당시 야마토 왕권의 국력을 고려할 때, 왜가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복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복 대상이 대가야로 한정된다면 충분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해석 하에서는, 영락 6년 당시 원정 대상이 백제임을 고려한다면 신묘년 기사에서 전쟁과 무관해 보이는 왜가 언급된 것은 왜의 반파 침공을 사주(또는 용인)한 장본인이 바로 백제이기 때문이며, 고구려는 이를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신묘년에 왜계 세력이 준동하도록 만든 배후가 바로 백제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명분으로 하여 영락 6년의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이 학설의 한 가지 문제점은 과연 C에서의 결자가 返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는 것인데, 해당 글자의 마모가 극심한 탓에 쉽게 판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론: 엄청 열심히 썼으니까 추천눌러줘잉 베라 가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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